2007년 10월 30일 화요일

실 없는 소리


인간의 문명은 많은 직업을 낳았으며 그 중 일부는 변화되고 존속되었으며 그 중 일부는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그런 직업이 있었나 싶은 직업 중 하나로 활자를 뽑아 배열하는 식자공을 꼽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책을 인쇄하기 위해 반드시 활자를 선별해 조판하는 식자공이 필요했지만 컴퓨터의 발달과 함께 그 일은 편집 디자이너와 컴퓨터의 몫이 되었습니다.
컴퓨터와 탁상 출판 시스템이 생겨나지 않았다면 여전히 식자공은 긴요한 직업으로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단지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의 외국어 교육은 앞으로 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접근으로써의 언어 공부는 계속되겠지만 말입니다.
한국인은 영어에 목숨을 건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영어 교육열이 대단히 강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너무 많은 사회적 비용을 지출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아이의 혀에 메스를 댄 다는 해외 토픽감 기사나 토플 같은 영어 시험의 성적 향상을 위해 인격적인 모욕과 스트레스 마저 당연하게 여기는 학원 시스템과 여기에 몰리는 수강생들에 관한 기사를 보고는 도를 지나친 광기마저 엿보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영어 교육은 이젠 거기에 밥숟가락 걸친 사람이 너무 많아 파국을 보기 전까지는 계속 덩치를 불리며 비탈길을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보입니다. 영어가 경쟁력이라고 외치는 사람을 면면을 살펴 보면 거의 대부분이 영어 교육 산업 종사자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영어를 배운 사람들 상당수가 다시 영어 교육 산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젠 그 덩치에 압도되어 모두 거기에 휩쓸려 더 큰 눈덩이를 만들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가까운 미래에 그 파국이 보일 듯 합니다.

다음은 얼마 전 한 인터넷 신문에 실린 기사의 일부입니다.

2005년 10월 27일 피츠버그시 카네기멜론 대학(CMU). 이 대학 연구진을 포함한 미국의 여러 학자들과 독일 칼스루허 대학 관계자들이 영상 회의를 열었다. 이날 회의는 CMU 알렉스 웨이벨 교수팀의 통역기 연구가 최초로 공개되는 자리.
대만 유학생 스탠 조우씨가 입 주위와 목에 11개의 전극을 붙이고 등장했다. 조우씨는 모국어인 만다린어로 중국어를 모르는 회의 참석자들에게 말했다. 조우씨의 몸에 붙은 전극들은 입 동작을 파악해 조우씨의 중국어 정보를 컴퓨터로 보냈다. 1~2초 뒤에 조우씨의 말은 영어로 바뀐 채 스피커를 통해 회의 참석자들에게 들렸다.
"Let me introduce our new prototype. You can speak in Mandarine and it translates into English or Spanish."(제가 우리의 새 통역기 모델을 소개해 볼게요. 여러분들은 만다린어를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어와 스페인어로도 통역될 수 있고요).

이 기사에 따르면 관련 전문가들은 앞으로 10년 이내에 전문 통역기가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특정 영역-여행이나 의학, 엔지니어링 등-만의 전문 통역이 아니라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통역기가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 가까이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기는 합니다. 비록 문자 수준의 해석이기는 하나, 일본은 진작에 한국과 중국어 번역기 개발에 열중해왔고 현재 한국어 사이트와 일본어 사이트 간에는 실시간 번역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이트에서는 한국 네티즌과 일본 네티즌 간에 한일 감정을 앞세운 치졸한 말싸움을 각자의 언어로 주고 받을 만큼 문자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영어의 경우에도-일본어 번역 보다는 좀 더 실망스럽긴 하지만, 구글에서 영어 사이트의 실시간 번역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말 10년 내에 이것이 가능해지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자, 이제 외국어 공부는 모두 때려 치우자! ' 이 딴 주장이나 하려고 장황하게 말을 꺼낸 것은 아닙니다. 컴퓨터에서 자연어 명령어 처리기를 개발해서 음성 명령을 인식하게 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 제가 아는 한도에서만 해도 IBM의 OS2 시절부터이니 십수년이 더 되었습니다만 아직도 제 컴퓨터는 제 말을 못알아듣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통역기의 등장과 그 영향력의 파급은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지리라 보아집니다. 실시간 통역기는 다시 바벨탑을 쌓아올리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제껏 인류가 접하지 못했던 솔루션으로 그 상업적 가치는 대단히 크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이 기존의 단방향 커뮤니케이션을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으로, 이동전화가 위치에 제약받지 않고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몰고온 경제적 가치는 이미 충분히 경험해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인터넷과 이동통신이 결합하는 새로운 컨버젼스 기기-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다시 우리 목전에서 해일처럼 밀려오고 있습니다. 아마 이 물결이 우리를 휩쓸고 난 그 다음 물결은 바로 언어 장벽이 해소를 통한 전지구적 정보 소통-커뮤니케이션이 되리라 믿습니다. 기존의 인터넷, 이동통신이 정치, 사회, 문화, 경제에 끼친 파급효과를 생각한다면 이 거대하고 매력적인 전인미답의 신대륙을 코 앞에 두고 가만히 앉아 손가락만 빨고 있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미덕이 아니겠죠.

정작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아이들이 주역이 될 근 미래가 우리 아이들에게 요구할 핵심 역량은 무엇일까 하는 문제 제기 입니다. 만약 학자들의 예언대로 10년 후 외국어를 실시간으로 통역하는 통역기가 나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고 또 어떤 능력이 더 핵심적인 능력으로 평가 받을까요?

예를 들어 한국인과 미국인 그리고 중국인이 각자의 나라에서 이번 수출 물량의 가격 조건을 휴대전화로 통화하고 있습니다. 실시간 통역기가 장착된 이 휴대전화는 각자가 자신의 모국어로 하는 말을 동시에 상대방 언어로 해석해서 상대방에게 들려줍니다. 현재의 휴대전화의 컨버젼스를 살펴보면 이 정도 상황 설정은 충분히 가능할 것 같군요. 자, 그러면 이 상황에서 요구되는 능력은 무엇일까요? 외국어 구사 능력일까요? 자신의 생각을 설득시키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일까요? 적어도 지금까지는 다국적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외국어 구사 능력'의 비중이 컸지만 앞으로는 좀 더 무형적인 '설득력'이 더 중요한 역량이 되지 않을까요?

10년이라면 지금 어린이라고 불리는 연령대 아이들이 청년이 될 무렵입니다. 과연 그 때에도 지금처럼 영어교육 시장이 위세를 부릴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 보다는 해당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고 문화적 다원주의 입장에서 그 문화를 존중하고 수용할 수 있는 학습의 기회가 커져 나가기를 개인적으로 기대합니다만 그건 논외로 하고.

여튼 중요한 건 우리 아이들인데 기껏 청춘을 식자공 기술 익히는데 바쳤는데 좀 인정받고 먹고 살만하니 컴퓨터가 나와서 회사에서 나가라고 하더라... 뭐 이런 일이 우리 아이들에게 일어나지 않으란 법은 있을까요?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우리 아이들이 사회활동을 시작할 근 미래에도 그렇겠지만 진정한 핵심역량은 영어가 아닙니다. 그런데 근미래에는 그렇다고 쳐도 지금도 핵심 역량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소린가 하는 의문을 품을지도 모르겠군요.

조기 유학을 통해 딴 건 몰라도 영어 능력은 갖추었다고 믿어지는 아이들이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조기 유학생이 기업에서 환영받고 있느냐? 결론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리고 아직도 일부에서는 그 희소성 때문에 찾는 경우가 없지는 않으나 대기업의 경우에는 써 보니 아니더라는 판단이 인사 담당자들의 입에서 슬슬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공부한 사람 중에서도 필요한 만큼의 외국어 구사 능력을 갖춘 후보자들은 널리고 널렸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이고, 조기유학으로 영어는 잘 할지 모르나 한국 문화에 문외한이 되어 한국의 조직 사회에 잘 적응을 못한다는 것이 두번째 이유 입니다. 천재도 사회성이 떨어지면 자폐로 오진되는 세상인데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그걸 적절하게 펼쳐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실상 대부분의 경우에는 업무 수행 능력이 특출나게 더 좋은 것도 아닙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의 미래를 책임질 핵심 인재를 유학파에서 찾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유학파가 모두 삼성의 핵심 인재인 것은 아니듯이 말입니다.
하버드니 스탠포드니 하는 명문 대학을 나왔다고 해도 조직 문화에 적응 못하면 튕겨나가는 마당인데,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미국의 지방 사립대학 졸업생을 선뜻 한국대학 졸업생 대신 선택하는 위험을 선택할까요?

조기 유학은 아예 한국을 돌아오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선택할 수 있는 교육 전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 나라에서 그 나라 사람으로 정착하고 산다면 모를까 한국을 돌아올 것을 전제로 한다면 투입 대비 효과가 비효율적인 교육 전략이라는 말이죠
물론 한국에서 학부를 보내고 다시 외국으로 나가서 전문 학위를 받아오는 네오엘리트 코스가 요즘 각광을 받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 코스도 일단은 한국의 명문 대학 학부를 졸업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곤란합니다. 그런데 한국 명문 대학 입학은 해외에서 성장한 아이들에게 특례가 아니라면 사실 상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해외에서 자녀를 키우시는 학부모님들이라면 다들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당장 해외에서 자녀를 키우는 한인 가정 중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전제로 하는 경우에는 외국 학교 공부와는 별개로 한국 수능 과목 공부를 별도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러니하죠. 한국의 교육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면서 자녀를 조기 유학 보내고서는 정작 외국에서 다시 한국 방식으로 한국 공부를 시키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조기유학으로 샜군요. 조기 유학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이야기 하기로 하고 다시 주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어쨌던 외국어 구사 능력 자체는 지금까지는 어땠는지 몰라도 앞으로는 점점 더 중요한 핵심역량에서 주변부 역량으로 옮겨질 것 입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만큼 정확하게 인식하고 적절하게 판단하여 올바르게 표현하는 '설득력'의 중요성은 더욱 더 강해질 것입니다. 무엇으로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더욱 더 중요한 핵심적인 역량으로써 우리 아이들에게 요구될 것입니다.

P.S 말이 길어지고 산만해졌습니다만 이 글의 주제는 자녀에게 키워줘야 할 핵심역량은 따로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지, 영어나 조기 유학 자체가 필요없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타문화 이해와 함께 외국어의 사용 능력은 통역기가 이동전화처럼 쓰인다고 하더라도 보조적인 능력으로써 여전히 대단히 중요하고 유용한 지식 형성의 기초가 될 수 있으며 조기 유학 역시 자녀의 미래 계획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대단히 좋은 자녀 교육 방법입니다.

2007년 10월 29일 월요일

열길 물 속은 몰라도 4


* 이 글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어떤 목적으로도 본문의 수정, 첨삭은 금지되며 원저자의 사전 허락 없는 본문의 일부나 전체의 인용, 게시, 배포도 금지됩니다. 감사합니다. *


2장 열길 물 속은 몰라도 내 아이 속 만큼은 4


지난 글에서 자녀의 성공을 위해 세 번째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흥미라고 이야기 했습니다만… 누구나 알지만 잘 모르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의 흥미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앞에서도 비유했듯이 흥미는 옷 고르기에서 그 옷의 ‘용도가 뭐냐?’ 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가 용도와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자, 치수도 맞고 디자인도 딱 맘에 드는 드레스를 골랐습니다. 그런데 그 드레스를 입고 수영장을 간다면? 아니면 상가집을 가는데 수영복을 고른다면? 스킨 스쿠버를 할 건데 스키복을 고른다면? 이건 좀… 요즘 개그 코너 중 하나인 "이건 아니잖아" 라는 단말마가 나올 것 같군요.
아무리 몸에 맞고 멋진 옷이라고 해도 용도에 맞지 않다면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화재 현장에 수영복을 입고 출동하는 소방관처럼 어떤 경우에는 위험하기조차 합니다.

다시 말해 옷을 고를 때는 그 옷의 용도가 우선적으로 고려되듯이, 자녀의 성공에도 그 목표나 방향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방향은 어디서 나올 수 있을까요? 물론 과거에는 부모님이나 준거집단의 압력이 그 방향을 결정하기도 했고, 아직도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점점 개개인의 의사가 존중되는 지금에 있어 그 방향의 단초는 바로 자녀의 흥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 자녀의 흥미가 뮙니까?

이런 질문에 막히지 않고 답할 수 있는 부모가 과연 몇이나 될까요?
심지어는 자신의 흥미조차 모르는 경우(불행히도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까지의 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가 허다한데, 자녀의 흥미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적성이란 개념조차 없이 무조건 배우고 익혀야 하는 시절을 거치면서 내 자식만큼은 하고 싶은 것, 적성에 맞는 것을 교육 시켜 줘야지라고 다짐하고 마음 굳게 먹지만, 문제는 자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과거 자신의 부모님이 선택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선택을 하는 것이 오늘날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의 실상입니다.
게다가 제도화 된 집단교육, 특히 한국처럼 테크트리에 따른 효율적인 수능 고득점자 양산에 초점이 맞춰진 현실 속에서는 부모 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볼만한 충분한 경험도 지식도 , 성찰도 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 면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겠다는 목표 의식을 뚜렷이 가진 아이들은 어떻게 보면 행운아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행운을 가진 케이스 보다는 부모나 주변의 권유를 자신의 흥미로 자기 암시 하거나, 그것도 없이 말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왜 하는 지도 모를 공부를 시키니까 한다는 식의 경우가 더 많습니다.
잘하지도 못하는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니 할 맛이 나지 않고 결국 담을 쌓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미래에 대한 목표가 없이 계획이 있을 수 없고 실천의 에너지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궁색하게 제시되는 미래가 수능 몇 점, 혹은 수도권 소재 무슨 대학 하는 식의 동기 형성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먼 불충분한 목표 제시 밖에는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자녀의 흥미를 (가급적이면 자녀 스스로) 탐색하고 그 흥미와 맞는 분야를 자신의 목표로 삼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자녀에게 “어느 대학 갈래?”가 아니라 “무슨 전공을 하고 싶냐”라고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입학 전에는 일류, 졸업 후에는 이류나 삼류라는 소리를 듣는 한국 대학교의 현실은 바로 이런 점과도 맥이 닿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실력은 있을지 몰라도 열정이 없는 학생들에게서 과연 어떤 학문적 성취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취직 시험이나 공무원 시험 준비에나 바쁠 뿐이죠. 이런 취업 준비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준비라면 또 이야기가 틀려지지만, 원치 않는-아니 원하는지 아닌지도 모를- 전공을 선택하고 대학을 왔던 패턴의 반복인 경우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자녀의 성공을 위한 방향타로서 흥미를, 자녀의 성공을 위해 당신이 알아야 할 세 번째 요소로 꼽고 싶습니다.

자, 그럼 다음 글에서는 이런 지능과 성격유형, 흥미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2007년 10월 28일 일요일

열길 물 속은 몰라도 3


* 이 글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어떤 목적으로도 본문의 수정, 첨삭은 금지되며 원저자의 사전 허락 없는 본문의 일부나 전체의 인용, 게시, 배포도 금지됩니다. 감사합니다. *


3장 열길 물 속은 몰라도 내 아이 속 만큼은 3


자녀의 특성으로써 두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성격 유형입니다.
성격유형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성격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가 엄밀한 학문적 정의를 다루는 자리는 아니므로 성격유형 개념이 갖는 실용성에 초점을 두고자 합니다. 흰 고양이던 검은 고양이던 쥐만 잘 잡으면 되니까요.

성격유형은 자녀의 성공에 어떻게 관련이 있을까요?

물론 단순히 착한 아이는 잘되고 못된 아이는 벌받는다는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전래 동화의 교훈을 되풀이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자녀의 성공에 있어서 성격유형을 주목하는 이유는 성격유형이 그 사람의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는 경험적 통찰 때문입니다.

사람은 컴퓨터와 달리 정보의 인식과 처리, 그리고 표현에 있어서 주관을 벗어나 객관적이기가 상당히 힘이 듭니다. 당장 무엇인가를 인식할 때 많은 정보 중에서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더 크게, 빨리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이고 이것은 처리와 표현 단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격유형을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정보를 선택적으로 지각하고 해석, 표현하는데 있어서의 일정한 경향성이 그 사람의 성격 유형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면, 역으로 그 사람의 성격유형을 이해함으로써 그 사람이 세계를 대하는 경향성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는 가정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를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에 활용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정보처리 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유용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 기대됩니다.

그런 면에서 자녀의 성공을 옷 입기로 비유할 때 지능이 치수로써 의미가 있다면, 성격 유형은 어떤 디자인에 대한 선호 경향-패턴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디자인이 있고 선택에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옷을 입어야 편하고 만족감이 생기기 마련이고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옷을 입어야 옷 맵시가 나기 마련입니다.

패션 감각이 최신 명품을 온몸에 휘두르는 재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산 옷이라 해도 그 옷을 입을 사람에게 맞게 코디네이터 할 줄 아는 재능을 말하듯이 자신이 선호하고 익숙한 방식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코디네이터 해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특히 정보처리의 경향성과 성격유형과의 상호작용에 있어서의 이런 특징은 최근 들어 학습스타일이라는 개념으로 구체화되면서 점차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 받고 있습니다.
유화 물감으로 수채화식 붓 터치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불가능하지야 않겠지만 그리 일반적이고 적절한 선택이라고 할 수는 없듯이 그 사람의 성격 유형-패턴에 맞지 않은 행동을 요구하는 것 역시 그리 적절한 선택은 아닙니다. 반면, 재료의 특성을 잘 알고 이런 성질을 잘 이용한다면 어떤 재료로도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듯이 자신과 자녀의 성격 유형을 알고 그 차이를 이해한다면 자녀의 성공에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옷도 디자인에 따라 신체적 특징-치수를 도드라지게 보이게도 하고 드러나지 않게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디자인의 옷을 입느냐는 그 사람을 드러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 사람의 신체적 장점을 부각시켜주기도 하고 결점을 보정해주고 덮어주는 역할까지 합니다. 비유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지능의 크고 작음은 일반적인 범주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는 첫번째 이유이기도 합니다.

자, 치수도 딱 맞고 디자인도 마음에 드는 옷을 골랐습니다. 그런데 또 무엇을 고려해야 할까요? 옷 고르는데 또 다른 것도 필요한가요?

예 있습니다. 바로 용도입니다. 그 옷을 어디에 입을 것이냐는 거죠.

다음 호에서는 자녀의 성공을 위해 알아야 할 세 번째 항목으로써 흥미를 살펴보겠습니다.

2007년 10월 27일 토요일

열길 물 속은 몰라도 2


* 이 글의 저작권은 유병도에게 있습니다. 어떤 목적으로도 본문의 수정, 첨삭은 금지되며 원저자의 사전 허락 없는 본문의 일부나 전체의 인용, 게시, 배포도 금지됩니다. 감사합니다. *


2장 열길 물 속은 몰라도 내 아이 속 만큼은 2


지능은 인간의 지적 활동을 위한 기본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가장 첫번째로 꼽을 수 있는 항목입니다.

그런데 지능을 자녀의 성공을 위한 요인 중 하나로 들다 보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능이 높아야만 좋은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가장 처음으로 꼽고 가장 기본이 되는 필수 항목이라고 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건물에는 대부분 기초가 있고 그림에는 바탕색이 있지만 아무도 바탕색을 그림이라고 하지 않고 기초를 건물로 보지는 않듯이 말입니다.
지능 역시 그 자체가 성공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척도라고 하기 보다는 성공을 위한 바탕, 기초로써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종종 낮은 지수에 실망하시거나 높은 지수에 화색이 도는 부모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영재라고 해서 마냥 기뻐할 일은 못 되는 것 같습니다. 영재는 각종 발달 장애로 오진 되는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적 적응에 어려움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 여기에 대한 케어링이 필요하며, 영재가 가진 그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특수 교육을 제공해야 하는데 이것이 현실적으로는 대단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특히 다원성이 인정되지 못하는 집단 분위기에서 영재는 자신의 ‘선물 받은’ 재능을 버리고 ‘일반’ 속으로 백기투항 하던가 아니면 우리와는 다른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 찍히고 살아가던가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고흐와 같이 뭇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그러나 자신의 내면은 고통으로 가득 찼던 천재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힘겨운 선택보다는 천재성을 버림으로써 평탄한 생활을 선택한-대신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알려진 천재들보다 잘 살지 못했다, 또는 덜 행복했다고는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자면, 제5공화국 초기 국가적 차원에서 영재를 선발하고 교육하겠다는 시도가 한번 있었습니다. 정통성 없는 정부가 벌인 보여주기 행사라 실제 추진 의지가 없었는지, 이 시도는 1년 남짓 형식적으로 시행되다가 흐지부지 되고 맙니다. 그런데 이때 선발된 영재들의 거취를 몇 년이 지난 후 추적 조사를 해보니 대부분 자신의 능력을 살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통념에서의 성공과도 거리가 먼 낮은 성취를 보이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지능을 알아보아야 할 필요성은 옷을 고를 때의 신체치수와 같습니다. 팔 길이와 허리, 가슴 둘레 등 각 신체 사이즈를 정확하게 측정해 여기에 따라 옷을 만들면 자신의 몸에 딱 맞는 맞춤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기성복-현대적 제도 교육-도 맞춤옷에 비해 손색이 없는 편이므로 굳이 맞춤옷을 해 입는 경우가 흔치 않습니다. 그러나 기성복을 입을 때도 허리 치수 정도는 알고 있어야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지능은 그 사람에게 맞는 옷을 눈대중이 아니라 신체 치수로 고르듯이 자녀에게 적합한 교육전략을 선택할 때 기본적인 선택 기준을 제시해주고 혹, 특별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또는 선택에 유의점은 없는지 등에 관한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옷을 고를 때 고려해야 할 것 중에서 치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아마 디자인일 것입니다.
다음에는 옷의 디자인으로 비유될 수 있는 자녀 성공의 두 번째 요인인 성격 유형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조선족 그리고 코메리칸


예전에 제가 일하는 회사의 물류센터에는 조선족 부부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한국에서 열심히 번 돈으로 이미 고향에 슈퍼 마켓과 아파트까지 두채 가지고 있다는 자랑을 듣고는 그의 코리안 드림이 성공한 것이 한편으론 부러우면서 다행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 한국과 중국이 축구를 하면 자긴 중국팀 응원한다면서 대국의 국민인 것을 자랑스러워 한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좀 어리둥절 했습니다. 그래도 동포라고 생각했는데 배신감을 느낀다느니 따위의 순진한 분개라기 보다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을 본 탐험가처럼 신기했다고나 할까요?

어차피 축구는 한국에서 열린 월드컵도 관심없어 하는 편이라 누가 누굴 응원하건 말건 별로 신경도 쓰이지 않았고 중국에서 중국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조선족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하며 그냥 넘어가긴 했습니다만, 타자에 대한 배척과 우월감 덩어리인 중화사상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편인데, 그 대국이란 말을 화족도 아닌 조선족에게서 들으니 좀 인상이 깊게 남았나 봅니다.

이후로 시간이 지날 수록 조선족을 짝퉁 짱께니 뭐니 하면서 비하하는 한국인들을 점점 더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점점 많은 한국인들이 조선족의 이중적인 태도-권리를 주장할 때는 동포를 내세우고 의무에 대해서는 중국인임을 내세우는-를 이야기 하면서 이기적이고 자신만 아는 사람들로 비난합니다. 자기 아쉬워 한국에 왔으면서도 중국이 한국보다 큰 나라라며 한국을 우습게 여긴다고 분개합니다. 중국인으로 스스로를 생각하는 조선족을 한국인이 동포로 생각하고 잘해줄 필요가 없다고 까지 말합니다.

정체감은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지식과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정체감은 후천적인 것이며 이는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중국인으로 성장한 조선족에게 한국인의 정체감을 가지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의문스럽습니다. 행위와 사실에 대한 책임을 묻거나 자잘못을 따지는 것과는 별개로 적어도 너희도 한국인인데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이건 배신이다. 그래서 너희 보다 차라리 외국인이 더 낫다는 식의 감정적 대응은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자라나서 그렇게 가진 정체감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와는 비교되는 다른 사례를 하나 꼽아 보고 싶군요. 사실은 이 기사를 보고나서 조선족 경우가 떠올랐고 그래서 이 글을 씁니다.

그런데 지난 27일 동아일보에 난, '코리안 아메리칸 200만 시대…교포사회 빛과 그림자'라는 제목의 기사였는데요, 이 기사 말미가 아주 대미를 장식하더군요.
포트리라는 미국의 어느 지역에 한인 비율이 높아져서 지역 교육청에서 초등학생 희망자에 한해 영어와 한국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이중언어교육 시범 실시를 논의했다고 하는데 한인 학부모는 물론 다른 민족 학부모도 반대해서 이중언어교육이 실시되지 못했다는 내용입니다.

언어는 문화이자 사고이며 정체감 형성의 기본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를 다민족 국가 미국에서 당당히 주류 언어의 하나로 키울 생각은 고사하고 주어지는 기회도 앞장서서 마다하는 것을 보니 참 어이가 없습니다. 다른 타당한 이유도 있으리라 기대도 품어보지만 아마 십중 팔구는 아이들 영어 학습에 방해된다는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봐야 미국인들이라면 거지도 하는 영어 하나 제대로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그러면서 잃는 것이 무엇인지 간과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여러분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짝퉁 짱께와 코메리칸,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우리들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2007년 10월 26일 금요일

열길 물 속은 몰라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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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열길 물 속은 몰라도 내 아이 속 만큼은 1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죠. 사람의 속내를 알기가 어렵다는 비유이기는 합니다만 자녀의 성공을 위해서는 먼저 자녀의 특성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열길 물속은 몰라도 한길 내 아이 속내 만큼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특성을 파악할 수 있을까요? 아니, 그보다는 먼저 무엇을 파악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특성’ 한 단어로 뭉뚱그리면 부르기 편하고 말하기야 쉽겠습니다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자면 자녀의 특성, 이거 대단히 애매한 말이 됩니다.

당신 자녀의 특성은 무엇이죠? 아마 열에 일곱은 말문이 막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자녀의 특성에 대해 어느 정도 만족스럽게 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것이 자녀의 성공에 어떤 중요한 참조점이 될 수 있고 얼마만큼의 정보 가치가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마 남은 셋 중에서 다시 둘 이상은 자신 있게 자녀의 성공에 활용하고 있노라고 확언하지 못하리라 짐작됩니다.

그러므로 자녀의 특성 중 무엇을 살펴볼 것인지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목표는 구체적으로 정할수록 그것을 달성하기도 쉬워집니다. 이런 이유로 이번 장에서는 자녀의 성공과 관련이 있는 특성들을 이야기 하겠습니다.

그 전에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녀의 특성이란 것은 어떻게 보면 작은 연못에 비친 달의 잔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면에 비친 달의 모습이 달의 모습을 모두 담고 있지는 않으며, 달 그 자체인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게다가 그나마 비춰지는 모습마저도 혹 바람이라도 불면 흔들리는 수면에 의해 왜곡될 수 조차 있습니다. 그런데도 작은 연못에 비친 달의 형상을 마치 달 그 자체인 양 단정하는 것은 적절한 판단이 아닐 것입니다.


자녀의 특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특성들은 –물론 엄밀한 절차를 통해 가급적 외부 요인에 의해 왜곡되지는 않게 한다고 하더라도- 작은 연못에 비춰진 달처럼 자녀의 일부를 비춰주는 것이지 자녀의 전부, 또는 본질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익히 아는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막상 나와 내 자녀 문제가 되면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우를 검사 레포팅이나 상담 장면에서 종종 보아 왔기 때문에 노파심에 강조하는 것입니다. 특히 기대치 보다 낮은 지능 검사 결과를 알려드릴 때 이런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천적, 생리적 영향이 비교적 큰 지능의 높고 낮음 보다는 후천적이고 심리적인 자녀의 자존감이나 동기 수준에 마음을 쓰는 것이 부모와 자녀, 그리고 양자의 관계를 위해서도 더 좋은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여기까지 읽으신 분은 눈치 채셨겠지만 자녀의 성공과 관련되는 첫번째 특성은 바로 지능입니다.




>> 다음 글에 계속...

2007년 10월 24일 수요일

성공 비법은 없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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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내 아이의 성공 비법은 없다. 그러나...2



몇년 전 한국에서는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라는 구호가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약물 오남용을 막고 국민 건강을 도모한다는 취지로 의사의 진단을 거쳐 약사로부터 약을 구매하도록 하는 의약분업제도와 함께 나왔던 구호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이런 오남용에 대한 우려는 의료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40조원을 상회하는 한국 사교육 시장 규모는 뜨겁다 못해 데어 죽을 정도라는 한국의 교육열을 반영함과 아울러, 교육에서의 오남용이 있지는 않은지 한번 돌아보게끔 합니다.

실제로 형에게는 성공적이었던 방법이 동생에게는 적절하지 못할 수도 있고 철수에게는 먹으면 독이 되는 것이 영희에게는 약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에게 무엇이 얼마나 좋은지를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단 몸(자녀 교육)에 좋다고 하는 것은 일단 먹여(시켜)놓고 보자는 무차별 투여(사교육)가 있는 것은 아닌지, 그 와중에 부모는 허리가 휘고 자녀는 등이 굽고 오직 교육 사업자만이 배를 두드리는 형국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나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배가 아픈 아이에게 무조건 소화제를 먹이는 것이 적절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중에는 정말 소화불량으로 아픈 아이도 있을 것이고 이 경우에는 소화제가 효과가 있겠죠.
하지만 급성맹장염 이라면? (이런 공포의 조작을 통해 비즈니스는 성장합니다만… ) 급성 맹장염으로 고통스러워 하는데 소화제가 효과가 없다고 지사제, 진통제까지 약이란 약은 다 먹이는 것이 과연 적절한 방법일까요? 오히려 이 경우에는 소화제 한 알만 먹이는 마는 다소 무책임하게까지 보이는 방법이 오히려 다행이다 싶을 만큼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다는 것은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자녀가 아프다면 먼저 의사에게 진단을 받고 의사가 처방해준 약을 약사로부터 구해 먹이는 것이 순서이고 그것이 정말 아이를 위한 선택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녀의 교육에서도 좋다는 것은 가리지 않고 무작정 ‘시킬’ 것이 아니라 먼저 정확한 진단을 하고 적합한 전략을 수립한 다음 적절하게 시행하는 것이 제대로 된 순서일 것입니다.

고도화 되어가는 현대 문명은 보다 고숙련 기능과 전문적인 지식을 갖출 것을 개인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갖추기 위한 학습의 양과 질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학력 인플레가 일견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인재를 양성해 낼 수만 있다면야 일견 긍정적이기조차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평생 공부만 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양적으로 학습 기간을 늘이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교육계에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대안을 모색해 왔습니다. 이에 따라 교육 현장에서 개별화 교육이니 맞춤 교육이니 하는 새로운 용어들이 등장하고 밀려나는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도 결과적으로는 프로크러스테스의 침대에 아이를 눕히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수학을 못하면 계산을, 음악을 못하면 노래를 더 하도록 하는 정량적 대응 방법의 한계도 한계지만, 성적과 대입이라는 절대 명제에 얽매여 여기에 맞춰 자녀를 늘이려고 드는 문제 접근 방식을 바꾸지 않은 이상 이 문제의 해결은 요원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녀의 성공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기존의 정량적 문제해결 방식에 더해 정성적 접근이 병행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먼저 학습자-자녀의 특성을 파악하고 반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국어, 영어, 수학의 점수 같은 정량적 데이터 역시 학습자의 특성으로서 유의미 하나, 이 보다는 기초 학습 능력의 발달 여부와 발달 정도, 대상과 관계를 인식하고 수용하는 경향, 그리고 좋아하고 흥미를 갖는 것이 무엇인지 등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의사가 먼저 환자의 컨디션과 증상을 정확히 진단한 다음, 적합한 약을 선정하여 적절한 수단을 통해 치료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녀의 특성을 파악하고 적합한 전략을 수립한 다음 적절한 방법으로 교육을 하자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녀의 특성과 환경에 대한 냉정한 분석을 통해 결정하는 최선의 선택이야 말로 우리 자녀의 성공에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맞춤형 만병통치약’이 아닐까요?

자, 그렇다면 이런 정성적인 정보, 특성이란 것은 무엇일까요? 성적으로 대표되는 정량적 정보야 성적표로 쉽게 확인이라도 할 수 있지만 정성적 정보라는 건 묶어 말하기는 쉬워도 하나하나 가려 보기에는 다소 익숙하지 않은 편입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이와 관련된 자녀의 특성에 대해 이야기 해 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