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아내에게 심심치 않게 받는 압박 중 하나가 사 놓은 책은 언제 다 읽을 거냐는 겁니다. 간간이 지름신이 발동할 때마다 저를 제압하는 유효한 무기이기는 한데...
책을 선택하는 취향이 달라서 그렇지 책 읽기라면 아내 역시 사죽을 못쓰는 사람이라 이번에 아내가 읽을 책을 구매하면서 거기에 살짝 그간 제가 리스트업해두었던 도서 목록을 얹었습니다. 아주 살짝 얹는다고 얹었는데도 아내가 산 책 보다 3배나 많아지는 바람에 아마 책이 도착하면 또 당분간은 귀 닫고 눈 감고 살아야 할 듯 싶습니다. 그 전에 블랙베리를 사야 할텐데... 먼산...
여튼 그 책 도착하기 전에 전에 사놓은 책을 다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예전에 사 놓았던 책을 요즘 광속으로 읽는 중인데 그 중 가장 흥미롭게 본 책 중 하나가 바로 수잔 그린필드의 휴먼 브레인입니다. 사이언스북스에서 나온 사이언스마스터 6번째 책인 이 책은 책 제목 그대로 인간의 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아마 공부를 계속했다면 생리심리학이나 인지심리학을 계속하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제게는 관심이 있었던 영역이라 그런지 빨리 읽혀지더군요. 게다가 요즘 관심을 갖는 것 중 하나가 뇌기반 학습이라 당면 과제와도 관련되는 이야기고 해서 뇌 관련 책을 좀 볼 필요도 있었구요.
이 책은 상향적 접근법과 하향적 접근법을 차례로 구사하며 우리 인간의 뇌에 대한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들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인간의 뇌에 대한 연구가 미개척인 상태로 놓은 영역도 많고, 알려진 지식 마저도 종종 뒤집어지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현재까지의 뇌 연구 결과는 적어도 몇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는 뇌의 기능을 특정 뇌 부위별로 배정할 수 없다는 것이죠. 흔히들 알려져 있듯이 두뇌 중 어느 부위는 생각하는 곳, 또 어느 부위는 보는 곳, 움직이는 곳 이런 식으로 어떤 능력과 어떤 뇌 부위가 일대일로 매칭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느 기능에서나 여러 뇌 부위들이 동시에 작용함으로써 우리는 외부 세계에 효과적으로 반응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뇌의 여러 부위가 상호 조합됨으로써 하나의 기능이 구현되기 때문인지, 우리가 하나라고 생각하는 기능이 사실은 여러 기능의 조합이기 때문인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여튼 우리 인체의 다른 기관들이-심장이 피를 순환하고 신장이 피를 걸러주는 것처럼 고유의 기능이 있는 것과는 달리 뇌의 각 부위는 하나의 기능을 구현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현대 뇌 연구자들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미시적으로는 신경세포가 어떻게 작용하고 신경전달물질이 어떻게 기능하느냐에 대한 주제에서 저자는 아주 흥미로운 주장을 하나 하더군요. 바로 뇌 내 정보 전달이 화학 물질에 좌우되는 특성 때문에 뇌와 동등한 컴퓨터를 만드려는 어떤 시도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실제로 저 역시 왜 신경정보 전달에 시냅스와 신경전달물질의 존재가 필요한지에 대해 궁금했었는데 거기에 대한 아주 좋은 설명을 찾은 것 같습니다. 만약 신경세포들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전기적으로만 신호가 전달되면 더 단순한 구조로 효율적이고 빠르게 신호를 전달했을지도 모르지만, 뇌는 이런 단순함과 효율을 추구하기 보다는 각 단계마다 서로 다른 조합의 신경전달물질을 사용함으로써 다양성과 융통성을 선택한 것입니다. 실제 우리 인간의 진화 역시 특정 환경에 대한 최적화 보다는 다양성과 융통성을 갖는 쪽으로 진화했기에 환경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 될 수 있었고 현재 먹이사슬의 정점에 설 수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 선택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회로도와 정해진 알고리즘에 근거하는 현대 컴퓨터 기술이 이런 다양성과 융통성, 그리고 이로 인해 생겨나는 창발성을 갖추기는 어렵기에 저자의 이런 주장에 저도 동감하게 됩니다. 아무도 계산 빠르게 하는 컴퓨터는 상상해도 시를 짓는 컴퓨터는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죠.
뇌의 발달과 기능 구성에 있어서 흥미로웠던 것은 출생 전 급격하게 증가한 뇌 세포들이 출생 이후 연결을 시작하면서 사용하지 않으면 (기능이) 퇴화하는 결정적인 시기를 거친다는 것입니다.
갓 태어난 오리가 처음 움직이는 물체를 어미로 인식하는 각인처럼 대부부의 동물은 학습에 결정적인 시기가 있으며 아예 유전적으로 프로그램밍 된 행동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탁월한 융통성으로 인해 학습에 있어서 민감한 시기가 있긴 해도 그런 결정적인 시기를 갖지는 않는 편입니다. 그러나 신체 기능에 있어서는 이런 결정적인 시기가 여전히 유효한듯 합니다.
아기 때 사소한 감염을 치료하기 위해 2주간 한쪽 눈에 반창고를 붙인 소년이 그 눈을 실명한 사례가 그것인데, 어른의 경우라면 이미 신경의 연결이 확립되어 그런 처치가 문제가 없었겠지만 출생 직후의 아기는 아직 눈과 뇌 사이의 신경 연결 형성이 수립되지 않았고 바로 그 때가 신경 연결 형성에 결정적인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기본 능력에서부터 고차원적인 기억에 이르기까지 신경망의 연결이 대단히 중요한 역활을 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보다 낮은 차원의 기본적인 능력일 수록 되돌리기 어려운 불가역적이고 결정적인 시기가 있는 듯 합니다. 그리고 이는 발달 초기 자녀에 대한 양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해주는 근거가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현대의 뇌 연구는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에 의해 상향식 연구와 하향식 연구가 이루어 지고 있으나 아직 두 연구결과가 서로 만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뇌에 대한 연구를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독일 서쪽에서 진공하는 연합군과 동쪽에서 진공하고 있는 소련군처럼 언젠가는 엘바강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그 엘바강이 어떤 모양일지 궁금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라는 게슈탈트 원리가 살아 숨쉬는 뇌가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유혹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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