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8일 화요일

대니얼 데닛의 마음의 진화

 과거 인간의 마음에 대한 통찰과 연구는 철학자의 몫이었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들 철학자들의 이러한 성찰은 나름 진지했으나, 세상이 불, 물, 공기, 흙으로 이루어졌다는 4원소설만큼이나 우스꽝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이들이 가진 관찰과 지식의 한계 속에서 내린 결론이나 선언이 아니라 그들이 그런 결론을 내리기 위해 사용했던 사유와 성찰 과정에 있을 것이다. 재료가 좋지 않았기에 옹기를 만들었을 뿐, 그 옹기를 빗고 구운 기술만큼은 인정하고 배워야 한다고나 할까? 최고급 도자기를 만들 좋은 흙을 가졌어도 그 옹기만큼 변변한 그릇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나일지도 모른다. 선대의 영광에 비견해 지금의 나를 자학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위대한 그들을 못난 오만으로 비웃지는 말자는 것이지.

 사실 철학에 대한 내 태도는 거기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다.
 철학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제도교육의 영향으로 다른 분야 보다 지식보다는 사고의 전개 틀을 중시하는 특성을 가진 철학을 만만히 보는 경향과 이미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바꾸고자 하는 목적의식에 오염됨으로써 눈이 멀어버린 맹목적인 이즘의 횡포를 접하면서 '근거없는 사변과 순환론의 연속인 철학' 에 대해 일종의 불신마저 품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겠지만 여기에 대한 반론을 들어보고 생각해볼 기회는 그리 갖지 못했다.
"도대체 철학자가 하는 게 뭐야?"

 물론, 내가 대니얼 데닛이 쓴 마음의 진화라는 책에서 그런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이언스 마스터즈 시리즈의 다른 책과 달리 이 책에서 대니얼 데닛은 눈에 띄는 지식이나 결론을 독자에게 제시하지는 않는다. 내가 가진 전형적인 철학자의 스테레오타입이랄까? 자, 이런 문제가 있고 내가 여기까지 한번 생각해봤는데, 당신 생각은 어때? 우리 한번 생각해 보자... 뭐 이런 식이다.

 처음 이 책을 펼치고 저자가 철학자임을 알았을 때, 과학자가 아닌 철학자가 마음을 주제로 다룬다는 것이 참신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고대부터 마음은 철학자의 영역이었지 과학의 영역이 아니었다! 아마 심리학이 마음이라는 영역에 깃발을 꼿음으로써 더 이상 철학자가 여기에 끼어들 여지는 없다고 생각한 나의 오만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참신한 것은 참신한 것이고 일단 철학은 자꾸 나에게 생각하라고 윽박지르기 때문에 좀 귀찮다... 책 읽는 게 피곤해지기 시작한다.
 집어던질까 말까 망설이면서 계속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나는 철학자가 실험과 과학적 방법에 매달려 개미처럼 일하는 과학자보다 훨씬 자유롭고 풍부한 상상력과 (과학만큼이나 엄밀한) 논리성으로 무장한 채 굼뜬 과학자들 머리 위로 통통 뛰어오르는 메뚜기처럼 느껴졌다. 과학이 증명하는 존재라면 철학은 예견하고 가설하는 존재일지 모르겠다. 하긴 초창기 유럽 심리학자들이 다시금 재조명 받는 것도 그들의 그런 철학적 통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튼 현재까지 밝혀진 과학적 사실과 지식을 토대로 철학자가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는 것을 목격한 것은 내게 대단히 흥미 있는 경험이었다.

 몸에도 마음이 있고 우리가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의식은 보다 적은 희생을 치르고 살아남기 위한 진화론적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저자의 가설은 대단히 인상깊은 주장이었다. 거짓말을 할 때 진땀을 흘리거나 무대에 나갔을 때 떨리는 등 우리가 우리의 의식과는 달리 몸이 행동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의식하는 마음이 아닌 몸의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라는 이야기인데- 잘못하면 프로이드의 의식 무의식이 떠올를지도 모르겠다-  이것을 저자는 다윈의 생물>스키너의 생물>포퍼의 생물 3단계로 나눠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런 주장을 되씹으며 나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오덕스러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3지안이라는 일본 만화가 생각이 났다. 3개의 눈을 가진 이 종족은 죽지 않는 불사의 종족으로 원래 인간을 노예로 부리며 살았다고 한다. 안죽다보니 너무 오래 살아 인격이 망가지기도 하고 그래서 그 종족은 멸망하게 되는데, 히로인 격인 3지안은 자신의 원래 인격을 봉인하고 새로운 인격을 만들어 냄으로써 세월의 풍상과 종족의 멸망에 대한 아픈 기억에서자신을 지켜낸다. 가끔 원래 인격이 나오기도 하지만, 새로 만들어진 인격은 아이처럼 세상을 보고 새로이 세상을 경험한다. 그렇다고 이 새로운 인격이 기존의 인격의 지배를 받는 것은 아니다. 서로를 생각하고 좋은 영향을 끼치려고 노력을 하지만 한 인격이 다른 인격을 지배하려 들거나 하지는 않는다. 원인이나 방법, 결과물이 모두 틀리긴 하지만... 응? 그런데 왜 3지안 이야기는 꺼냈대?

어찌되었건 마음 역시 진화의 산물이고 적자생존의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합한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아이디어이다. 현대 언어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촘스키가 인간의 언어능력은 선천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아마 인간의 마음 역시 선천적으로 타고 난 생리적 기반 위에 타고난 것이고 이것이 적자생존의 경쟁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마음으로 형성되는 것이라고 상상해본다면 심리유형론자가 이야기 하는 기질이나 성격유형과도 맥이 닿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많은 생각꺼리를 주기는 하지만, 뭐랄까... 송진가루 한번 손에 묻혀본 적이 없는 내가 암벽등반 코스를 올려다 보는 느낌이다. 암벽이 멋지긴 한데 말이지.

사족 하나. 다윈의 진화론은 그냥 이런 게 있다가 아니라 정말 꼼꼼히 뜯어보아야 할 대상인 것 같다. 내가 무지해서 그렇겠지만 생각보다 다윈의 진화론은 저평가 받았다는 느낌이 요즘  책을 읽다 보면 진화론은 그냥 환경에 적응한 놈이 살아 남은 거래요라는 주장 그 이상의 것인 것 같다. 근데 그 이상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 ㅡㅡㅋ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