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마케팅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서적을 탐독할 때 비즈니스를 전쟁에 비유하면서 내가 이길 수 있는 전장에서 싸움을 하라는 구절이 기억에 남습니다. 블루 오션도 사실 이 말이 뜻하는 바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죠.
자녀의 교육에 신경 쓰시는 부모님에게도 마찬가지 요구를 하고 싶습니다. 잠깐 지금의 경주 트랙에서 벗어나 이 경주 전체를 한번 경기장 위에서 내려다 봐 주십시요. 트랙에서는 결승점 밖에 안보이고 거기에 전력을 다하는 것 밖에 생각할 수 없지만,한 걸음 물러날 경우 우리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먼저 한국의 교육 현실을 살펴볼까요? 아니, 그 보다 왜 교육을 해야 하는지부터 짚어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왜 부모님은 자녀를 교육 시키시나요?
과거 로마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친 7가지 과목은
라틴어와 그리스어-언어.
말을 효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적절히 표현하는 기능을 배우는 수사학(레토릭).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터득하기 위한 변증학.
그리고 산수, 기하, 역사, 지리였다.
이 일곱 과목을 '아르테스 리베랄레스'라고 불렀는데 직역하면 '일반학과'이고, 의역하면 인간이 제 구실을 하는 데 필요한 '교양학과'가 된다. 이 말은 오늘날에도 이탈리아어의 '아르테 리베랄레', 영어의 '리버럴 아츠'로 남아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중).
이는 교육이 기본적으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제 구실을 하는데 필요한 기본 요건을 갖추게 해주는 수단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인에게 교육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사실 앞에서 말한 정도의 의미에서 본다면 한국의 교육열은 유별나도 한참 유별납니다. 혹자들은 이런 한국의 교육열을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오바마가 몇번이나 한국의 교육열을 인용했다는 제도 언론의 낯간지러운 기사를 보면서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은 버리고 가는 비정한 한국 고교 교실의 현실을 알고 나서도 그들이 한국의 교육을 부러워할지 의문스럽습니다.
스스로도 광풍이라고 칭하는 한국의 이런 교육열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요? 아마 그것은 ‘과거’에 장원급제 함으로써 입신양명 한다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의 유전이 공부를 출세의 지름길, 유일무이한 수단으로 인식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지난 6, 70년대 ‘고시’ 합격자에 대한 사회적 환대는 과거에 장원급제 한 유생에 대한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고, 예비고사, 본고사 시절 국내 최고 명문대 수석 합격자나 학력고사 전국 수석에 대한 사회적 관심 역시 언론의 각종 인터뷰를 통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가난한 가정에서 역경을 딛고 열심히 공부해 수석 합격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는 둥, 앞으로도 열심히 공부해 훌륭한 법관, 외교관이 되어 나라에 이바지 하겠다는 미담식 기사는 어디서 많이 듣던 옛날 이야기 같이 천편일률적이었습니다.
반상의 구별이라는 전근대적인 신분제도는 없어졌으나 사회적 인식은 여기에 따라가지 못한 한국 근대사회는 이제 누구나 학생이 되어 공부할 수 있고 입신양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신문에서 그런 성공사례들을 연일 다루고 있으니 바야흐로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되는 세상이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은 한국의 부동산 불패 신화처럼 견고한 교육열로 연결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런 와중에 시간이 흘러 오늘도 한국에서는 매년 60만명 이상의 고3 졸업생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속칭 서울 소재 명문대에 입학하는 3만 명 남짓 되는 아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55만 명은 ‘바보’ 취급을 받는 것이 현실입니다.
게다가 IMF를 거치면서 반강제적으로 세계화된 한국 사회는 눈 앞의 이익을 위해 성장잠재력을 갉아먹을 수도 있는 행동들을 기업들의 경영합리화라는 미명으로 지지해 버렸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개발 독재 시절부터 한국은 사회보장이 대단히 미약했고 그 역활을 기업의 평생고용을 통해 해결해온 경향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까지 그것을 기업에게 지고 가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기업에게 평생고용의 짐을 내려놓게 했다면 그 짐을 국가가 사회보호 장치를 만들어 흡수하고, 그럼으로써 성장잠재력을 보호해야 하는데 멀쩡한 강 파는데만 관심있는 작금의 한국 정부는 그럴 의사가 별로 없는 듯이 보입니다. 찬바람 부는 콩크리트 보와 둑 위에서 우리 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들도 맨몸으로 서 있게 되었습니다.
더 비관적으로 말한다면 2009년 기준 현 세대에서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안정적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급여나 소득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 숫자는 그 해의 대기업이나 공기업 취업 인원과 그 보다 소수의 전문직종 종사자, 그리고 부를 대물림 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은 수준의 자산을 보유한 부모의 자녀 숫자를 합친, 많이 쳐줘봐야 3만명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머지 95%의 아이들은요?
이미 많은 20대가 ‘청년 실업’이라는 사회 문제의 중심에 놓인채 88만원 세대로 비하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이것은 개선될 기미없이 누적되어 갈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싸워도 전체의 95%를 '루저'로 만들어 버리는 전쟁터가 바로 한국의 교육이고 한국의 현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아이들을 싸우게 하시겠습니까?
아직 아이를 손에 안아본적도 없는 초보아빠의 건방진 자만일지는 모르지만, 전 제 아이를 그 5%안에 넣을 자신이 있습니다. 심리학자 왓슨이었나요? 왜, 자기 제자와 바람피는 바람에 매장당한 비운의 심리학자-아놔~ 왜 이런 것만 생각이 나지?!!- 그가그랬다죠. 나에게 아기 열명만 준다면 원하는대로 과학자, 경찰, 범죄자로 만들어 내겠다고... 왓슷만큼 건방지게는 말 못하겠지만, 적어도 제 아이만큼은 게임의 룰이 그렇다면 그 게임의 룰에 따라 그렇게 할 자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 아이가 그 5%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방식으로 전개되는 전쟁입니다. 과연 그런 전쟁에서 이겨본들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글 앞머리에서 이길 수 있는 전장에서 싸우란 말을 인용한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95%가 루저가 되는 전쟁이 아니라 모두가 이길 수 있는 전쟁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이상적이라면 적어도 95%가 루저는 안되는 전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교육에 대한 전제, 전략, 목적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전장의 이동,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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