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 뉴욕 특집 1편이 나가자 미국 물 좀 먹고 와서 영어강사 한다는 사람이 거친 어조로 그들을 씹었다. 적어도 내가 이해한 그 주장의 개요는 영어도 못하면서 왜 미국에는 가서 나라 망신을 시키느냐는 거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의 의견을 놓고 갑론을박을 했고 광고 지면 이외의 빈칸을 채워야 하는, 늘 가쉽거리에 목 마른 기자들이 여기에 밥숟가락 얹어 놓으며 가쉽거리가 되다가 언제나처럼, 언제그랬냐는 듯이 그 논쟁은 잊혀져갔다.
그러나 나는 이것은 한번으로 끝난, 끝날 에피소드가 아니라고 본다. 이것은 자기가 잘나서 자기가 어리석은 국민을 이끈다고 생각하는 소위 좀 배웠네 하는 자들 일부의 의식 저변에 깔려 있는 무엇과 관련이 있는 것이기 때문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제는 누구도 관심 가지지 않는 지난 이야기를 끄집어 내어 건드리는 이유는 바로 이때문이다.
먼저 나는 왜 그 영어강사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분개하는지, 무한도전을 욕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왜 우리는 영어를 잘해야 하는가?
문득 명박정권의 정권인수위에서 활약하셨다는 명문 여자대학교 총장님의 "오륀지" 사건이 생각난다. 오렌지라고 하니 미국 사람들이 알아듣지못하고 오륀지로 말해야 미국 사람들이 알아듣더라는 이 양반이나 좋은 영어 발음을 위해 어린 자식의 혀에 칼을 대는 수술을 하는 부모나 산수 문제 푸는 데 국어 사전 펴들고 앉아 있는 꼴이다.
이미 비영어권 국가의 영어 사용 인구가 영어권 국가의 영어 사용자보다 더 많아졌으며, 비 영어권 사람이 정통 영어와는 다르게 말하고 이런 언어경향이 진화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있는 영국에서는 '정통' 영어를 쓰도록 요구만 하기 보다는 오히려 영어권 국가에서 이제 그 흐름을 예의주시하고 따라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예전에 신문에서 읽은 기억에 의존해서 하는 말이라 비록 이 의견이 영국 내 소수의견인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거론된 것인지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없다. 갑갑하면 직접 찾아봐라. 여튼 중요한 것은 심지어 영어 종주국에서도 "내가 원조니 나 하는대로 해!"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쓴다면 많이 사용되는 방향으로 따라가야 되지 않겠냐는 성찰을 보이는데 왜 한국의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은 오리지널 정통에 그다지도 집착하느냔 말이다. 유연성 없이 딱 배운대로 시키는 대로 하려고 드는 것을 티내는 것도 아니고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언어의 기본적인 역활은 의사소통이다. 개똥같이 말해도 찰떡처럼 알아들으면 되는 거지 왜 문법 생각하고 발음 생각하면서 꼬고 비틀어야 한단 말인가? 아! 하긴 그래야 영어 가르쳐 밥 먹고 살지. 쉬우면 누가 학원 오려고 하겠어?
그리고 무한도전의 행태가 창피하다고 했는데 왜 창피할까? 미국인들에게 무시당해서? 자, 그럼 한국을 여행온 미국인이 한국말을 모른다고 당신들은 무시할 것인가? 아니다. 아마 당신들은 자신이 아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본토 발음으로 친철히 설명해 줄 것이다. 그러나 아마 흔히들 말하는 동남아시아인이 어설픈 한국어로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아마 당신은 십중팔구 무시하는 태도를 보일고 생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미국인이 고향에서는 직장도 잡지 못하고 반백수로 빈둥거리다 한국에 원어민 강사가 되기 위해 온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 동남아 사람이 알고보니 한국에서 수십억원 규모의 자원 개발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는 해당 국가의 고위 차관이라면? 그리고 그 차관이 어느 한국인이게 불법체류 노동자 취급을 당해 불쾌했다고 하자. 당신은 그에게 뭐라고 할 것인가? 그렇다 어디가도 매너 없고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하는 못난 인간은 있는 것이다.
나는 피자를 집어던지던 맥잡의 미국인에게 무시당한 것 보다는 거리에서 무한도전 맴버가 나 영어 잘 못한다고 하니까 괜찮다, 나도 한국말 모른다라고 대답한 그 미국인을 더 눈여겨 보았다. 그리고 그들로써 미국인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고 싶다. 뭐, 그건 그렇고 본토 원어민도 괜찮다는데 왜 원어민 강사도 아닌 학원 선생이 영어 못한다고 떽떽 거리나? 하는 짓이 영어 못한다고 사람 무시하고 피자 집어 던지던 맥잡 짓과 똑 같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왜 우리는 영어를 잘 못하는 것을 창피해 해야하는가? 나는 그것이 감히 사대주의라고 본다. 명이 무너지자 유학의 정통은 자신들이 이었다며 스스로를 소중화로 일컫으며 몰락한 명황실을 위한 제사까지 지냈던 골수 사대주의자들! 아마 원어민이 오렌지라고 말하면 검지 손가락 좌우로 까딱거리며 오륀지라고 고쳐주면서 이젠 정통 영어의 정통은 소아메리카가 잇는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동남아시아에 살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 사는 한국인 중 대부분이 인니어를 배우는데 영어만큼 극성을 부리지 않는다. 그리고 어설프나마 틀리면 틀리는 대로 이 나라 말을 하고 또 이곳 사람들도 눈치껏 알아서 응대하는 경우가 많다. 이곳 현지인들을 무시한다면 잘못된 것이겠지만, 적어도 그게 아니라면 그 정도로 서로 눈치껏 의사소통하며 함께 살아갈 수는 있다. 이곳 언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상대방도 그걸 요구하지 않는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같은데 미국이라고 다르겠나? 미국에서도 영어 한마디 못하면서 사는 한국인이 적지 않다는 걸 보면 마찬가지이다. 근데 왜 그렇게 팍팍하게 구는 거냐? 아! 하긴 쉬운거고 쉽게 갈 수 있는 거라면 누가 돈 내고 배우겠어? 어렵고 힘든 거라야 돈 내고 배우지.
제발 오리지널, 정통 이딴 걸로 사람 현혹하지 말자. 꼭 그렇게 맞춰 살아야 하나? 공부 많이하고 어느 한 쪽으로 잘하시는 분들 잘났고 잘하는 건 알겠는데, 모두가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않느냐. 그래야 그쪽도 할 일이 있는 것이고. 정말 그런 능력이 필요한 곳에서 소용되면 되는 거다.
그렇게 잘하고 매끄럽게 잘 할거면 왜 미국까지 가서 무한도전 찍나? 그냥 한국에서 찍지. 잘못하고 실수하기 때문에 도전이 되는 거고, 그래서 재미가 있는 거다. 개그맨이 말장난으로 웃기는 데 그걸 하지말라면 도대체 뭘 하란 건가? 정극 드라마라도 찍으란 거냔 말이다.
추신. 뉴욕 한국 음식 특집 마지막에 비틀즈를 흉내낸 공연은 올해 무한도전의 백미 중에 백미라고 난 생각한다. 자신에게 겨눠진 비난마저도 비틀어 웃음의 소재로 삼는 이들은 진정한 코미디언이다! 나도 이제 무도빠인득.
2009년 12월 31일 목요일
2009년 12월 11일 금요일
웰리엄 캘빈의 생각의 탄생을 펴며
기왕 뇌와 마음 쪽으로 달린 김에 이번에 꺼내 든 책은 같은 시리즈 도서 중 하나인 웰리엄 캘빈의 생각의 탄생이었다. 어? 그런데 책 제본 상태가 좀 이상하네? 왜 새 책 답지 않게 헐겁지? 혹시 본 책인가? 책장을 뒤져보니 내용이 생소하다. 책 상태가 좀... 이네 투털거리며 서문부터 읽어 나갔다. 새로운 내용인듯... 하다가 마음의 진화를 읽고 쓴 지난 글에 다윈주의에 대한 언급을 한 것이 기억이 날 것이다. 그 글을 쓸 때 다윈주의에 대해 언급한 다른 책이 있었는데...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그렇다! 난 이미 이 책을 한 번 읽은 적이 있었다! 아놔... 그러고 보니 책 중간에 지능의 토대로서의 통사론을 다루면서 저자가 제안한 언어기계 그림이 눈에 익다. 지능이 언어와 밀접하다는 것과 번역기는 인지학자나 신경 과학작가 핵심 아이디어를 제공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떠오른다!
전에 읽었던 감흥을 되살리며 책을 읽는 것도 큰 즐거움이긴 하지만, 이미 읽은 책을 '너 누구?' 이러는 건 좀 심하다.
전에 읽었던 감흥을 되살리며 책을 읽는 것도 큰 즐거움이긴 하지만, 이미 읽은 책을 '너 누구?' 이러는 건 좀 심하다.
2009년 12월 9일 수요일
전장을 바꾸자
예전에 마케팅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서적을 탐독할 때 비즈니스를 전쟁에 비유하면서 내가 이길 수 있는 전장에서 싸움을 하라는 구절이 기억에 남습니다. 블루 오션도 사실 이 말이 뜻하는 바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죠.
자녀의 교육에 신경 쓰시는 부모님에게도 마찬가지 요구를 하고 싶습니다. 잠깐 지금의 경주 트랙에서 벗어나 이 경주 전체를 한번 경기장 위에서 내려다 봐 주십시요. 트랙에서는 결승점 밖에 안보이고 거기에 전력을 다하는 것 밖에 생각할 수 없지만,한 걸음 물러날 경우 우리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먼저 한국의 교육 현실을 살펴볼까요? 아니, 그 보다 왜 교육을 해야 하는지부터 짚어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왜 부모님은 자녀를 교육 시키시나요?
과거 로마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친 7가지 과목은
라틴어와 그리스어-언어.
말을 효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적절히 표현하는 기능을 배우는 수사학(레토릭).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터득하기 위한 변증학.
그리고 산수, 기하, 역사, 지리였다.
이 일곱 과목을 '아르테스 리베랄레스'라고 불렀는데 직역하면 '일반학과'이고, 의역하면 인간이 제 구실을 하는 데 필요한 '교양학과'가 된다. 이 말은 오늘날에도 이탈리아어의 '아르테 리베랄레', 영어의 '리버럴 아츠'로 남아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중).
이는 교육이 기본적으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제 구실을 하는데 필요한 기본 요건을 갖추게 해주는 수단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인에게 교육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사실 앞에서 말한 정도의 의미에서 본다면 한국의 교육열은 유별나도 한참 유별납니다. 혹자들은 이런 한국의 교육열을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오바마가 몇번이나 한국의 교육열을 인용했다는 제도 언론의 낯간지러운 기사를 보면서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은 버리고 가는 비정한 한국 고교 교실의 현실을 알고 나서도 그들이 한국의 교육을 부러워할지 의문스럽습니다.
스스로도 광풍이라고 칭하는 한국의 이런 교육열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요? 아마 그것은 ‘과거’에 장원급제 함으로써 입신양명 한다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의 유전이 공부를 출세의 지름길, 유일무이한 수단으로 인식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지난 6, 70년대 ‘고시’ 합격자에 대한 사회적 환대는 과거에 장원급제 한 유생에 대한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고, 예비고사, 본고사 시절 국내 최고 명문대 수석 합격자나 학력고사 전국 수석에 대한 사회적 관심 역시 언론의 각종 인터뷰를 통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가난한 가정에서 역경을 딛고 열심히 공부해 수석 합격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는 둥, 앞으로도 열심히 공부해 훌륭한 법관, 외교관이 되어 나라에 이바지 하겠다는 미담식 기사는 어디서 많이 듣던 옛날 이야기 같이 천편일률적이었습니다.
반상의 구별이라는 전근대적인 신분제도는 없어졌으나 사회적 인식은 여기에 따라가지 못한 한국 근대사회는 이제 누구나 학생이 되어 공부할 수 있고 입신양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신문에서 그런 성공사례들을 연일 다루고 있으니 바야흐로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되는 세상이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은 한국의 부동산 불패 신화처럼 견고한 교육열로 연결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런 와중에 시간이 흘러 오늘도 한국에서는 매년 60만명 이상의 고3 졸업생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속칭 서울 소재 명문대에 입학하는 3만 명 남짓 되는 아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55만 명은 ‘바보’ 취급을 받는 것이 현실입니다.
게다가 IMF를 거치면서 반강제적으로 세계화된 한국 사회는 눈 앞의 이익을 위해 성장잠재력을 갉아먹을 수도 있는 행동들을 기업들의 경영합리화라는 미명으로 지지해 버렸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개발 독재 시절부터 한국은 사회보장이 대단히 미약했고 그 역활을 기업의 평생고용을 통해 해결해온 경향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까지 그것을 기업에게 지고 가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기업에게 평생고용의 짐을 내려놓게 했다면 그 짐을 국가가 사회보호 장치를 만들어 흡수하고, 그럼으로써 성장잠재력을 보호해야 하는데 멀쩡한 강 파는데만 관심있는 작금의 한국 정부는 그럴 의사가 별로 없는 듯이 보입니다. 찬바람 부는 콩크리트 보와 둑 위에서 우리 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들도 맨몸으로 서 있게 되었습니다.
더 비관적으로 말한다면 2009년 기준 현 세대에서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안정적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급여나 소득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 숫자는 그 해의 대기업이나 공기업 취업 인원과 그 보다 소수의 전문직종 종사자, 그리고 부를 대물림 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은 수준의 자산을 보유한 부모의 자녀 숫자를 합친, 많이 쳐줘봐야 3만명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머지 95%의 아이들은요?
이미 많은 20대가 ‘청년 실업’이라는 사회 문제의 중심에 놓인채 88만원 세대로 비하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이것은 개선될 기미없이 누적되어 갈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싸워도 전체의 95%를 '루저'로 만들어 버리는 전쟁터가 바로 한국의 교육이고 한국의 현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아이들을 싸우게 하시겠습니까?
아직 아이를 손에 안아본적도 없는 초보아빠의 건방진 자만일지는 모르지만, 전 제 아이를 그 5%안에 넣을 자신이 있습니다. 심리학자 왓슨이었나요? 왜, 자기 제자와 바람피는 바람에 매장당한 비운의 심리학자-아놔~ 왜 이런 것만 생각이 나지?!!- 그가그랬다죠. 나에게 아기 열명만 준다면 원하는대로 과학자, 경찰, 범죄자로 만들어 내겠다고... 왓슷만큼 건방지게는 말 못하겠지만, 적어도 제 아이만큼은 게임의 룰이 그렇다면 그 게임의 룰에 따라 그렇게 할 자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 아이가 그 5%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방식으로 전개되는 전쟁입니다. 과연 그런 전쟁에서 이겨본들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글 앞머리에서 이길 수 있는 전장에서 싸우란 말을 인용한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95%가 루저가 되는 전쟁이 아니라 모두가 이길 수 있는 전쟁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이상적이라면 적어도 95%가 루저는 안되는 전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교육에 대한 전제, 전략, 목적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전장의 이동,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자녀의 교육에 신경 쓰시는 부모님에게도 마찬가지 요구를 하고 싶습니다. 잠깐 지금의 경주 트랙에서 벗어나 이 경주 전체를 한번 경기장 위에서 내려다 봐 주십시요. 트랙에서는 결승점 밖에 안보이고 거기에 전력을 다하는 것 밖에 생각할 수 없지만,한 걸음 물러날 경우 우리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먼저 한국의 교육 현실을 살펴볼까요? 아니, 그 보다 왜 교육을 해야 하는지부터 짚어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왜 부모님은 자녀를 교육 시키시나요?
과거 로마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친 7가지 과목은
라틴어와 그리스어-언어.
말을 효율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적절히 표현하는 기능을 배우는 수사학(레토릭).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터득하기 위한 변증학.
그리고 산수, 기하, 역사, 지리였다.
이 일곱 과목을 '아르테스 리베랄레스'라고 불렀는데 직역하면 '일반학과'이고, 의역하면 인간이 제 구실을 하는 데 필요한 '교양학과'가 된다. 이 말은 오늘날에도 이탈리아어의 '아르테 리베랄레', 영어의 '리버럴 아츠'로 남아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중).
이는 교육이 기본적으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제 구실을 하는데 필요한 기본 요건을 갖추게 해주는 수단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인에게 교육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사실 앞에서 말한 정도의 의미에서 본다면 한국의 교육열은 유별나도 한참 유별납니다. 혹자들은 이런 한국의 교육열을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오바마가 몇번이나 한국의 교육열을 인용했다는 제도 언론의 낯간지러운 기사를 보면서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은 버리고 가는 비정한 한국 고교 교실의 현실을 알고 나서도 그들이 한국의 교육을 부러워할지 의문스럽습니다.
스스로도 광풍이라고 칭하는 한국의 이런 교육열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요? 아마 그것은 ‘과거’에 장원급제 함으로써 입신양명 한다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의 유전이 공부를 출세의 지름길, 유일무이한 수단으로 인식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지난 6, 70년대 ‘고시’ 합격자에 대한 사회적 환대는 과거에 장원급제 한 유생에 대한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고, 예비고사, 본고사 시절 국내 최고 명문대 수석 합격자나 학력고사 전국 수석에 대한 사회적 관심 역시 언론의 각종 인터뷰를 통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가난한 가정에서 역경을 딛고 열심히 공부해 수석 합격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는 둥, 앞으로도 열심히 공부해 훌륭한 법관, 외교관이 되어 나라에 이바지 하겠다는 미담식 기사는 어디서 많이 듣던 옛날 이야기 같이 천편일률적이었습니다.
반상의 구별이라는 전근대적인 신분제도는 없어졌으나 사회적 인식은 여기에 따라가지 못한 한국 근대사회는 이제 누구나 학생이 되어 공부할 수 있고 입신양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신문에서 그런 성공사례들을 연일 다루고 있으니 바야흐로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되는 세상이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은 한국의 부동산 불패 신화처럼 견고한 교육열로 연결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런 와중에 시간이 흘러 오늘도 한국에서는 매년 60만명 이상의 고3 졸업생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속칭 서울 소재 명문대에 입학하는 3만 명 남짓 되는 아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55만 명은 ‘바보’ 취급을 받는 것이 현실입니다.
게다가 IMF를 거치면서 반강제적으로 세계화된 한국 사회는 눈 앞의 이익을 위해 성장잠재력을 갉아먹을 수도 있는 행동들을 기업들의 경영합리화라는 미명으로 지지해 버렸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개발 독재 시절부터 한국은 사회보장이 대단히 미약했고 그 역활을 기업의 평생고용을 통해 해결해온 경향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까지 그것을 기업에게 지고 가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기업에게 평생고용의 짐을 내려놓게 했다면 그 짐을 국가가 사회보호 장치를 만들어 흡수하고, 그럼으로써 성장잠재력을 보호해야 하는데 멀쩡한 강 파는데만 관심있는 작금의 한국 정부는 그럴 의사가 별로 없는 듯이 보입니다. 찬바람 부는 콩크리트 보와 둑 위에서 우리 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들도 맨몸으로 서 있게 되었습니다.
더 비관적으로 말한다면 2009년 기준 현 세대에서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안정적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급여나 소득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 숫자는 그 해의 대기업이나 공기업 취업 인원과 그 보다 소수의 전문직종 종사자, 그리고 부를 대물림 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은 수준의 자산을 보유한 부모의 자녀 숫자를 합친, 많이 쳐줘봐야 3만명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머지 95%의 아이들은요?
이미 많은 20대가 ‘청년 실업’이라는 사회 문제의 중심에 놓인채 88만원 세대로 비하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이것은 개선될 기미없이 누적되어 갈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싸워도 전체의 95%를 '루저'로 만들어 버리는 전쟁터가 바로 한국의 교육이고 한국의 현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아이들을 싸우게 하시겠습니까?
아직 아이를 손에 안아본적도 없는 초보아빠의 건방진 자만일지는 모르지만, 전 제 아이를 그 5%안에 넣을 자신이 있습니다. 심리학자 왓슨이었나요? 왜, 자기 제자와 바람피는 바람에 매장당한 비운의 심리학자-아놔~ 왜 이런 것만 생각이 나지?!!- 그가그랬다죠. 나에게 아기 열명만 준다면 원하는대로 과학자, 경찰, 범죄자로 만들어 내겠다고... 왓슷만큼 건방지게는 말 못하겠지만, 적어도 제 아이만큼은 게임의 룰이 그렇다면 그 게임의 룰에 따라 그렇게 할 자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 아이가 그 5%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방식으로 전개되는 전쟁입니다. 과연 그런 전쟁에서 이겨본들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글 앞머리에서 이길 수 있는 전장에서 싸우란 말을 인용한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95%가 루저가 되는 전쟁이 아니라 모두가 이길 수 있는 전쟁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이상적이라면 적어도 95%가 루저는 안되는 전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교육에 대한 전제, 전략, 목적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전장의 이동,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2009년 12월 8일 화요일
대니얼 데닛의 마음의 진화
과거 인간의 마음에 대한 통찰과 연구는 철학자의 몫이었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들 철학자들의 이러한 성찰은 나름 진지했으나, 세상이 불, 물, 공기, 흙으로 이루어졌다는 4원소설만큼이나 우스꽝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이들이 가진 관찰과 지식의 한계 속에서 내린 결론이나 선언이 아니라 그들이 그런 결론을 내리기 위해 사용했던 사유와 성찰 과정에 있을 것이다. 재료가 좋지 않았기에 옹기를 만들었을 뿐, 그 옹기를 빗고 구운 기술만큼은 인정하고 배워야 한다고나 할까? 최고급 도자기를 만들 좋은 흙을 가졌어도 그 옹기만큼 변변한 그릇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나일지도 모른다. 선대의 영광에 비견해 지금의 나를 자학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위대한 그들을 못난 오만으로 비웃지는 말자는 것이지.
사실 철학에 대한 내 태도는 거기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다.
철학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제도교육의 영향으로 다른 분야 보다 지식보다는 사고의 전개 틀을 중시하는 특성을 가진 철학을 만만히 보는 경향과 이미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바꾸고자 하는 목적의식에 오염됨으로써 눈이 멀어버린 맹목적인 이즘의 횡포를 접하면서 '근거없는 사변과 순환론의 연속인 철학' 에 대해 일종의 불신마저 품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겠지만 여기에 대한 반론을 들어보고 생각해볼 기회는 그리 갖지 못했다.
"도대체 철학자가 하는 게 뭐야?"
물론, 내가 대니얼 데닛이 쓴 마음의 진화라는 책에서 그런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이언스 마스터즈 시리즈의 다른 책과 달리 이 책에서 대니얼 데닛은 눈에 띄는 지식이나 결론을 독자에게 제시하지는 않는다. 내가 가진 전형적인 철학자의 스테레오타입이랄까? 자, 이런 문제가 있고 내가 여기까지 한번 생각해봤는데, 당신 생각은 어때? 우리 한번 생각해 보자... 뭐 이런 식이다.
처음 이 책을 펼치고 저자가 철학자임을 알았을 때, 과학자가 아닌 철학자가 마음을 주제로 다룬다는 것이 참신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고대부터 마음은 철학자의 영역이었지 과학의 영역이 아니었다! 아마 심리학이 마음이라는 영역에 깃발을 꼿음으로써 더 이상 철학자가 여기에 끼어들 여지는 없다고 생각한 나의 오만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참신한 것은 참신한 것이고 일단 철학은 자꾸 나에게 생각하라고 윽박지르기 때문에 좀 귀찮다... 책 읽는 게 피곤해지기 시작한다.
집어던질까 말까 망설이면서 계속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나는 철학자가 실험과 과학적 방법에 매달려 개미처럼 일하는 과학자보다 훨씬 자유롭고 풍부한 상상력과 (과학만큼이나 엄밀한) 논리성으로 무장한 채 굼뜬 과학자들 머리 위로 통통 뛰어오르는 메뚜기처럼 느껴졌다. 과학이 증명하는 존재라면 철학은 예견하고 가설하는 존재일지 모르겠다. 하긴 초창기 유럽 심리학자들이 다시금 재조명 받는 것도 그들의 그런 철학적 통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튼 현재까지 밝혀진 과학적 사실과 지식을 토대로 철학자가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는 것을 목격한 것은 내게 대단히 흥미 있는 경험이었다.
몸에도 마음이 있고 우리가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의식은 보다 적은 희생을 치르고 살아남기 위한 진화론적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저자의 가설은 대단히 인상깊은 주장이었다. 거짓말을 할 때 진땀을 흘리거나 무대에 나갔을 때 떨리는 등 우리가 우리의 의식과는 달리 몸이 행동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의식하는 마음이 아닌 몸의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라는 이야기인데- 잘못하면 프로이드의 의식 무의식이 떠올를지도 모르겠다- 이것을 저자는 다윈의 생물>스키너의 생물>포퍼의 생물 3단계로 나눠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런 주장을 되씹으며 나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오덕스러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3지안이라는 일본 만화가 생각이 났다. 3개의 눈을 가진 이 종족은 죽지 않는 불사의 종족으로 원래 인간을 노예로 부리며 살았다고 한다. 안죽다보니 너무 오래 살아 인격이 망가지기도 하고 그래서 그 종족은 멸망하게 되는데, 히로인 격인 3지안은 자신의 원래 인격을 봉인하고 새로운 인격을 만들어 냄으로써 세월의 풍상과 종족의 멸망에 대한 아픈 기억에서자신을 지켜낸다. 가끔 원래 인격이 나오기도 하지만, 새로 만들어진 인격은 아이처럼 세상을 보고 새로이 세상을 경험한다. 그렇다고 이 새로운 인격이 기존의 인격의 지배를 받는 것은 아니다. 서로를 생각하고 좋은 영향을 끼치려고 노력을 하지만 한 인격이 다른 인격을 지배하려 들거나 하지는 않는다. 원인이나 방법, 결과물이 모두 틀리긴 하지만... 응? 그런데 왜 3지안 이야기는 꺼냈대?
어찌되었건 마음 역시 진화의 산물이고 적자생존의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합한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아이디어이다. 현대 언어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촘스키가 인간의 언어능력은 선천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아마 인간의 마음 역시 선천적으로 타고 난 생리적 기반 위에 타고난 것이고 이것이 적자생존의 경쟁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마음으로 형성되는 것이라고 상상해본다면 심리유형론자가 이야기 하는 기질이나 성격유형과도 맥이 닿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많은 생각꺼리를 주기는 하지만, 뭐랄까... 송진가루 한번 손에 묻혀본 적이 없는 내가 암벽등반 코스를 올려다 보는 느낌이다. 암벽이 멋지긴 한데 말이지.
사족 하나. 다윈의 진화론은 그냥 이런 게 있다가 아니라 정말 꼼꼼히 뜯어보아야 할 대상인 것 같다. 내가 무지해서 그렇겠지만 생각보다 다윈의 진화론은 저평가 받았다는 느낌이 요즘 책을 읽다 보면 진화론은 그냥 환경에 적응한 놈이 살아 남은 거래요라는 주장 그 이상의 것인 것 같다. 근데 그 이상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 ㅡㅡㅋ
사실 철학에 대한 내 태도는 거기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다.
철학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제도교육의 영향으로 다른 분야 보다 지식보다는 사고의 전개 틀을 중시하는 특성을 가진 철학을 만만히 보는 경향과 이미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바꾸고자 하는 목적의식에 오염됨으로써 눈이 멀어버린 맹목적인 이즘의 횡포를 접하면서 '근거없는 사변과 순환론의 연속인 철학' 에 대해 일종의 불신마저 품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겠지만 여기에 대한 반론을 들어보고 생각해볼 기회는 그리 갖지 못했다.
"도대체 철학자가 하는 게 뭐야?"
물론, 내가 대니얼 데닛이 쓴 마음의 진화라는 책에서 그런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이언스 마스터즈 시리즈의 다른 책과 달리 이 책에서 대니얼 데닛은 눈에 띄는 지식이나 결론을 독자에게 제시하지는 않는다. 내가 가진 전형적인 철학자의 스테레오타입이랄까? 자, 이런 문제가 있고 내가 여기까지 한번 생각해봤는데, 당신 생각은 어때? 우리 한번 생각해 보자... 뭐 이런 식이다.
처음 이 책을 펼치고 저자가 철학자임을 알았을 때, 과학자가 아닌 철학자가 마음을 주제로 다룬다는 것이 참신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고대부터 마음은 철학자의 영역이었지 과학의 영역이 아니었다! 아마 심리학이 마음이라는 영역에 깃발을 꼿음으로써 더 이상 철학자가 여기에 끼어들 여지는 없다고 생각한 나의 오만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참신한 것은 참신한 것이고 일단 철학은 자꾸 나에게 생각하라고 윽박지르기 때문에 좀 귀찮다... 책 읽는 게 피곤해지기 시작한다.
집어던질까 말까 망설이면서 계속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나는 철학자가 실험과 과학적 방법에 매달려 개미처럼 일하는 과학자보다 훨씬 자유롭고 풍부한 상상력과 (과학만큼이나 엄밀한) 논리성으로 무장한 채 굼뜬 과학자들 머리 위로 통통 뛰어오르는 메뚜기처럼 느껴졌다. 과학이 증명하는 존재라면 철학은 예견하고 가설하는 존재일지 모르겠다. 하긴 초창기 유럽 심리학자들이 다시금 재조명 받는 것도 그들의 그런 철학적 통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튼 현재까지 밝혀진 과학적 사실과 지식을 토대로 철학자가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는 것을 목격한 것은 내게 대단히 흥미 있는 경험이었다.
몸에도 마음이 있고 우리가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의식은 보다 적은 희생을 치르고 살아남기 위한 진화론적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저자의 가설은 대단히 인상깊은 주장이었다. 거짓말을 할 때 진땀을 흘리거나 무대에 나갔을 때 떨리는 등 우리가 우리의 의식과는 달리 몸이 행동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의식하는 마음이 아닌 몸의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라는 이야기인데- 잘못하면 프로이드의 의식 무의식이 떠올를지도 모르겠다- 이것을 저자는 다윈의 생물>스키너의 생물>포퍼의 생물 3단계로 나눠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런 주장을 되씹으며 나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오덕스러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3지안이라는 일본 만화가 생각이 났다. 3개의 눈을 가진 이 종족은 죽지 않는 불사의 종족으로 원래 인간을 노예로 부리며 살았다고 한다. 안죽다보니 너무 오래 살아 인격이 망가지기도 하고 그래서 그 종족은 멸망하게 되는데, 히로인 격인 3지안은 자신의 원래 인격을 봉인하고 새로운 인격을 만들어 냄으로써 세월의 풍상과 종족의 멸망에 대한 아픈 기억에서자신을 지켜낸다. 가끔 원래 인격이 나오기도 하지만, 새로 만들어진 인격은 아이처럼 세상을 보고 새로이 세상을 경험한다. 그렇다고 이 새로운 인격이 기존의 인격의 지배를 받는 것은 아니다. 서로를 생각하고 좋은 영향을 끼치려고 노력을 하지만 한 인격이 다른 인격을 지배하려 들거나 하지는 않는다. 원인이나 방법, 결과물이 모두 틀리긴 하지만... 응? 그런데 왜 3지안 이야기는 꺼냈대?
어찌되었건 마음 역시 진화의 산물이고 적자생존의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합한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아이디어이다. 현대 언어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촘스키가 인간의 언어능력은 선천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아마 인간의 마음 역시 선천적으로 타고 난 생리적 기반 위에 타고난 것이고 이것이 적자생존의 경쟁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마음으로 형성되는 것이라고 상상해본다면 심리유형론자가 이야기 하는 기질이나 성격유형과도 맥이 닿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많은 생각꺼리를 주기는 하지만, 뭐랄까... 송진가루 한번 손에 묻혀본 적이 없는 내가 암벽등반 코스를 올려다 보는 느낌이다. 암벽이 멋지긴 한데 말이지.
사족 하나. 다윈의 진화론은 그냥 이런 게 있다가 아니라 정말 꼼꼼히 뜯어보아야 할 대상인 것 같다. 내가 무지해서 그렇겠지만 생각보다 다윈의 진화론은 저평가 받았다는 느낌이 요즘 책을 읽다 보면 진화론은 그냥 환경에 적응한 놈이 살아 남은 거래요라는 주장 그 이상의 것인 것 같다. 근데 그 이상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 ㅡㅡㅋ
2009년 11월 30일 월요일
구글 웨이브 시범 서비스 참여
지금 사용하는 구글 메일도 시범서비스가 시작되는 걸 알자마자 바로 초청장을 구해서 여태까지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이번에 구글에서 새로운 서비스 '웨이브'를 시범서비스 중이란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신청을 했습니다.
안되는 영어로 서너줄 써서 보냈는데도 오늘 사용 허가 메일이 왔군요. 사실 서비스의 정확한 개념이나 사용법 등을 아는 것도 아니고, 현재는 시범 서비스 중이라 영문 서비스로만 제공되어 별 기대도 않했지만 초청장이 와서 기쁜 마음으로 접속했습니다.
근데 이 뭥미...? 구글의 이메일과 노트, 쇼셜네트웍 서비스등이 혼재된 협업도구라는 정도의 개념만 가지고 있었는데... 음...
일단 닥치고 검색 관련자료를 들쑤셔 보면서 개념부터 잡아야겠습니다.
그간 구글의 행보는 여러가지로 제게 흥미를 주는 대상이었습니다. 이미 주가 총액이 IBM을 넘어선 자본주의의 총아인 주제에 '악마가 되지 말자'는 기업 구호부터해서 미국에서 경매로 나온 주파수를 사들여 무료 인터넷으로 공개하겠다는 선언으로 통화료 떨어먹는 재미에 빠져있던 이동통신회사를 엿먹이려 든 것도 그렇고 ... 물론 이 시도는 좌절되었습니다만. 가치를 사용자가 소유하게끔 함으로써 돈을 번 기존 업체들과는 달리 가치의 전환-value shift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이들이 보이는 행보는 제레미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영문 원제 The Age of Access)에서 주장하는 바와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들 역시 현재까지 가장 큰 수익 모델은 광고이고 이 광고는 사용자에게 소유를 격려하는 것이란 점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를 압도한다고 해도 결국 상부구조는 하부구조를 근간으로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요즘 트위터가 인기라죠? 한국에선 철수했지만 페이스 북도 세계적으론 인기인가 봅니다. 여기 이동통신회사의 요금제 중에 페이스북 접속에 한해서는 아주 싼 접속료를 부과하는 요금 상품도 나왔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2000년대 초반 메일과 메신저 채팅에서 딱 멈춰있던 저의 인터넷 사용 양태는 "그 딴 거 필요없다. 이 블로거 하나 글쓰는 것도 귀찮아 죽겠구만." 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좀 바꿀 때가 오지 않았나 싶군요. 그렇다고 부지런해지겠다는 것이 아니라 저의 게으름을 상쇄시켜줄 환경이 점차 도래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 선두에 있는 것이 바로 구글의 각종 웹기반 서비스입니다.
사실 웹으로 문서를 작성하도록 하는 구글 노트나 그룹스 등은 제게 그 전조를 보여주기는 했습니다만 몇가지 이유(결국은 귀차니즘으로 통합되긴 합니다만...)로 그간 사용을 유보했지만 이번 웨이브 참여를 기회로 공부 좀 해야겠습니다.
참, 내년에 구글에서 개발한 구글 크롬을 os로 한 넷북이 나온다고 하는데, 제 생각에는 아마 이 넷북은 구글이 제시하는 이런 웹기반 사용환경과 찰떡궁합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 아이들에게 PSP나 DS가 아닌 넷북을 사줘야 한다고 제가 생각하는 이유이죠. 그러고 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내년 필수 지름 품목이 하나 선정 되었습니다. 근데 어떻게 사죠?
몇가지 방법이 있긴 한데... 먼저 용돈을 안쓰고 모아서 지른다... 허락 안받고 샀다고 그나마 한달에 십만원 내외로 아내(라고 쓰고 갑이라고 읽는다)가 결제하던 용돈이 결제 정지되는 부작용이 있을듯 하군요.
둘. 이 글을 보여주면서 넷북의 필요성을 아내(라고 쓰고 아내님이라고 읽는다)에게 설득해서 사달라고 한다. 그 동안 ICT 잘 모르는 아내에게 생색내며 자행했던 각종 구박을 한방에 모두 되돌려 받게 될 듯 한데... 문제는 그러고도 사 준다는 보장은 없.... OTL
셋. 매출(?)을 조작(?)해 아내에게 전부 상납(?) 하지 않고..... 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우리 따님 얼굴도 못보고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를 모험은 안하는 게...
근데 지금 블랙베리도 못지르고 있잖아? 안될꺼야 난 아마..... ㅠㅠ
2009년 11월 25일 수요일
남자의 자격 - 아내가 사라졌다를 보고
요즘 스마트 폰에 ‘꼿혀’ 관련 정보를 좀 찾아 다녔는데, 스마트 폰 사용하려다가 내가 스마트해져야겠다는 사용자의 푸념 아닌 푸념이 기억에 남더군요. 그리고 얼마 전 KBS의 남자의 자격에서 아내가 집을 나갔다는 주제로 출연자-당연히 남성-들이 가사 노동을 일일 체험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전자레인지를 조작하지 못하거나 진공청소기의 손잡이를 길게 늘이는 것을 몰라 청소 내내 허리를 숙인 중년 남성의 이야기가 재미있게 묘사되더군요.
문명의 이기라는 것이 좀 편해 보겠다고 만든 것이기는 하지만 실상 그것을 이용해 좀 편해 보려면 먼저 그것을 배워야 하는 수고를 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또 만만치가 않습니다. 제가 카메라 내장 휴대전화에도 알러지 반응을 일으킨 이유가 아마 이런 학습에 대한 귀찮음 때문일지 모릅니다.
이런 새로운 학습에 대한 요구의 빈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문명의 이기’가 예전보다 더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단지 일상의 편리를 제공하는 기계만이 아니라, 이런 새로운 학습에 대한 요구는 우리 생활 전면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요즘 아이들이 관심을 갖는 것 중 하나인 SNS의 대표주자 페이스 북입니다. 한국에선 랜챗도 유행하나 보더군요. SNS, 페이스 북, 랜챗 등등 부모님 입장에선 듣도 보도 못한 것이지만 아이들에게 유행이라니 이것이 무엇인지도 알아둬야 할 필요가 생깁니다.
여하튼, 여기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는 내가 원하던 원치 않던 배워야 할 것이 늘어나고 있고 그 배움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쉽게도 예전처럼 노인이 현인으로 대접받는 시대는 지났나 봅니다.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현대 사회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학습할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참 피곤합니다.
자, 그런데 지금도 이 정도인데 미래를 살 우리 아이들은 어떨까요? 아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지금 우리의 지식은 이 아이들에겐 무용할지도 모릅니다.
교육이 더 중요해지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그러나 ‘미래’를 대비한 지식의 축적으로써의 교육은 그다지 매력이 없을 것 같습니다. 지식의 수명주기가 짧은데다가 그 양도 너무 방대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교육의 목적도 이것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누구나 물고기 보다는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참 쉽지 않은 주제이긴 합니다.◆
문명의 이기라는 것이 좀 편해 보겠다고 만든 것이기는 하지만 실상 그것을 이용해 좀 편해 보려면 먼저 그것을 배워야 하는 수고를 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또 만만치가 않습니다. 제가 카메라 내장 휴대전화에도 알러지 반응을 일으킨 이유가 아마 이런 학습에 대한 귀찮음 때문일지 모릅니다.
이런 새로운 학습에 대한 요구의 빈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문명의 이기’가 예전보다 더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단지 일상의 편리를 제공하는 기계만이 아니라, 이런 새로운 학습에 대한 요구는 우리 생활 전면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요즘 아이들이 관심을 갖는 것 중 하나인 SNS의 대표주자 페이스 북입니다. 한국에선 랜챗도 유행하나 보더군요. SNS, 페이스 북, 랜챗 등등 부모님 입장에선 듣도 보도 못한 것이지만 아이들에게 유행이라니 이것이 무엇인지도 알아둬야 할 필요가 생깁니다.
여하튼, 여기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대를 사는 우리는 내가 원하던 원치 않던 배워야 할 것이 늘어나고 있고 그 배움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쉽게도 예전처럼 노인이 현인으로 대접받는 시대는 지났나 봅니다.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현대 사회는 인간에게 끊임없이 학습할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참 피곤합니다.
자, 그런데 지금도 이 정도인데 미래를 살 우리 아이들은 어떨까요? 아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지금 우리의 지식은 이 아이들에겐 무용할지도 모릅니다.
교육이 더 중요해지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그러나 ‘미래’를 대비한 지식의 축적으로써의 교육은 그다지 매력이 없을 것 같습니다. 지식의 수명주기가 짧은데다가 그 양도 너무 방대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교육의 목적도 이것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누구나 물고기 보다는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참 쉽지 않은 주제이긴 합니다.◆
2009년 11월 24일 화요일
휴먼 브레인
제가 아내에게 심심치 않게 받는 압박 중 하나가 사 놓은 책은 언제 다 읽을 거냐는 겁니다. 간간이 지름신이 발동할 때마다 저를 제압하는 유효한 무기이기는 한데...
책을 선택하는 취향이 달라서 그렇지 책 읽기라면 아내 역시 사죽을 못쓰는 사람이라 이번에 아내가 읽을 책을 구매하면서 거기에 살짝 그간 제가 리스트업해두었던 도서 목록을 얹었습니다. 아주 살짝 얹는다고 얹었는데도 아내가 산 책 보다 3배나 많아지는 바람에 아마 책이 도착하면 또 당분간은 귀 닫고 눈 감고 살아야 할 듯 싶습니다. 그 전에 블랙베리를 사야 할텐데... 먼산...
여튼 그 책 도착하기 전에 전에 사놓은 책을 다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예전에 사 놓았던 책을 요즘 광속으로 읽는 중인데 그 중 가장 흥미롭게 본 책 중 하나가 바로 수잔 그린필드의 휴먼 브레인입니다. 사이언스북스에서 나온 사이언스마스터 6번째 책인 이 책은 책 제목 그대로 인간의 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아마 공부를 계속했다면 생리심리학이나 인지심리학을 계속하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제게는 관심이 있었던 영역이라 그런지 빨리 읽혀지더군요. 게다가 요즘 관심을 갖는 것 중 하나가 뇌기반 학습이라 당면 과제와도 관련되는 이야기고 해서 뇌 관련 책을 좀 볼 필요도 있었구요.
이 책은 상향적 접근법과 하향적 접근법을 차례로 구사하며 우리 인간의 뇌에 대한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들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인간의 뇌에 대한 연구가 미개척인 상태로 놓은 영역도 많고, 알려진 지식 마저도 종종 뒤집어지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현재까지의 뇌 연구 결과는 적어도 몇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는 뇌의 기능을 특정 뇌 부위별로 배정할 수 없다는 것이죠. 흔히들 알려져 있듯이 두뇌 중 어느 부위는 생각하는 곳, 또 어느 부위는 보는 곳, 움직이는 곳 이런 식으로 어떤 능력과 어떤 뇌 부위가 일대일로 매칭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느 기능에서나 여러 뇌 부위들이 동시에 작용함으로써 우리는 외부 세계에 효과적으로 반응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뇌의 여러 부위가 상호 조합됨으로써 하나의 기능이 구현되기 때문인지, 우리가 하나라고 생각하는 기능이 사실은 여러 기능의 조합이기 때문인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여튼 우리 인체의 다른 기관들이-심장이 피를 순환하고 신장이 피를 걸러주는 것처럼 고유의 기능이 있는 것과는 달리 뇌의 각 부위는 하나의 기능을 구현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현대 뇌 연구자들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미시적으로는 신경세포가 어떻게 작용하고 신경전달물질이 어떻게 기능하느냐에 대한 주제에서 저자는 아주 흥미로운 주장을 하나 하더군요. 바로 뇌 내 정보 전달이 화학 물질에 좌우되는 특성 때문에 뇌와 동등한 컴퓨터를 만드려는 어떤 시도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실제로 저 역시 왜 신경정보 전달에 시냅스와 신경전달물질의 존재가 필요한지에 대해 궁금했었는데 거기에 대한 아주 좋은 설명을 찾은 것 같습니다. 만약 신경세포들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전기적으로만 신호가 전달되면 더 단순한 구조로 효율적이고 빠르게 신호를 전달했을지도 모르지만, 뇌는 이런 단순함과 효율을 추구하기 보다는 각 단계마다 서로 다른 조합의 신경전달물질을 사용함으로써 다양성과 융통성을 선택한 것입니다. 실제 우리 인간의 진화 역시 특정 환경에 대한 최적화 보다는 다양성과 융통성을 갖는 쪽으로 진화했기에 환경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 될 수 있었고 현재 먹이사슬의 정점에 설 수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 선택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회로도와 정해진 알고리즘에 근거하는 현대 컴퓨터 기술이 이런 다양성과 융통성, 그리고 이로 인해 생겨나는 창발성을 갖추기는 어렵기에 저자의 이런 주장에 저도 동감하게 됩니다. 아무도 계산 빠르게 하는 컴퓨터는 상상해도 시를 짓는 컴퓨터는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죠.
뇌의 발달과 기능 구성에 있어서 흥미로웠던 것은 출생 전 급격하게 증가한 뇌 세포들이 출생 이후 연결을 시작하면서 사용하지 않으면 (기능이) 퇴화하는 결정적인 시기를 거친다는 것입니다.
갓 태어난 오리가 처음 움직이는 물체를 어미로 인식하는 각인처럼 대부부의 동물은 학습에 결정적인 시기가 있으며 아예 유전적으로 프로그램밍 된 행동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탁월한 융통성으로 인해 학습에 있어서 민감한 시기가 있긴 해도 그런 결정적인 시기를 갖지는 않는 편입니다. 그러나 신체 기능에 있어서는 이런 결정적인 시기가 여전히 유효한듯 합니다.
아기 때 사소한 감염을 치료하기 위해 2주간 한쪽 눈에 반창고를 붙인 소년이 그 눈을 실명한 사례가 그것인데, 어른의 경우라면 이미 신경의 연결이 확립되어 그런 처치가 문제가 없었겠지만 출생 직후의 아기는 아직 눈과 뇌 사이의 신경 연결 형성이 수립되지 않았고 바로 그 때가 신경 연결 형성에 결정적인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기본 능력에서부터 고차원적인 기억에 이르기까지 신경망의 연결이 대단히 중요한 역활을 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보다 낮은 차원의 기본적인 능력일 수록 되돌리기 어려운 불가역적이고 결정적인 시기가 있는 듯 합니다. 그리고 이는 발달 초기 자녀에 대한 양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해주는 근거가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현대의 뇌 연구는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에 의해 상향식 연구와 하향식 연구가 이루어 지고 있으나 아직 두 연구결과가 서로 만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뇌에 대한 연구를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독일 서쪽에서 진공하는 연합군과 동쪽에서 진공하고 있는 소련군처럼 언젠가는 엘바강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그 엘바강이 어떤 모양일지 궁금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라는 게슈탈트 원리가 살아 숨쉬는 뇌가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유혹하지 않을까 합니다.
책을 선택하는 취향이 달라서 그렇지 책 읽기라면 아내 역시 사죽을 못쓰는 사람이라 이번에 아내가 읽을 책을 구매하면서 거기에 살짝 그간 제가 리스트업해두었던 도서 목록을 얹었습니다. 아주 살짝 얹는다고 얹었는데도 아내가 산 책 보다 3배나 많아지는 바람에 아마 책이 도착하면 또 당분간은 귀 닫고 눈 감고 살아야 할 듯 싶습니다. 그 전에 블랙베리를 사야 할텐데... 먼산...
여튼 그 책 도착하기 전에 전에 사놓은 책을 다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예전에 사 놓았던 책을 요즘 광속으로 읽는 중인데 그 중 가장 흥미롭게 본 책 중 하나가 바로 수잔 그린필드의 휴먼 브레인입니다. 사이언스북스에서 나온 사이언스마스터 6번째 책인 이 책은 책 제목 그대로 인간의 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아마 공부를 계속했다면 생리심리학이나 인지심리학을 계속하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제게는 관심이 있었던 영역이라 그런지 빨리 읽혀지더군요. 게다가 요즘 관심을 갖는 것 중 하나가 뇌기반 학습이라 당면 과제와도 관련되는 이야기고 해서 뇌 관련 책을 좀 볼 필요도 있었구요.
이 책은 상향적 접근법과 하향적 접근법을 차례로 구사하며 우리 인간의 뇌에 대한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들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인간의 뇌에 대한 연구가 미개척인 상태로 놓은 영역도 많고, 알려진 지식 마저도 종종 뒤집어지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현재까지의 뇌 연구 결과는 적어도 몇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는 뇌의 기능을 특정 뇌 부위별로 배정할 수 없다는 것이죠. 흔히들 알려져 있듯이 두뇌 중 어느 부위는 생각하는 곳, 또 어느 부위는 보는 곳, 움직이는 곳 이런 식으로 어떤 능력과 어떤 뇌 부위가 일대일로 매칭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느 기능에서나 여러 뇌 부위들이 동시에 작용함으로써 우리는 외부 세계에 효과적으로 반응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뇌의 여러 부위가 상호 조합됨으로써 하나의 기능이 구현되기 때문인지, 우리가 하나라고 생각하는 기능이 사실은 여러 기능의 조합이기 때문인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여튼 우리 인체의 다른 기관들이-심장이 피를 순환하고 신장이 피를 걸러주는 것처럼 고유의 기능이 있는 것과는 달리 뇌의 각 부위는 하나의 기능을 구현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현대 뇌 연구자들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미시적으로는 신경세포가 어떻게 작용하고 신경전달물질이 어떻게 기능하느냐에 대한 주제에서 저자는 아주 흥미로운 주장을 하나 하더군요. 바로 뇌 내 정보 전달이 화학 물질에 좌우되는 특성 때문에 뇌와 동등한 컴퓨터를 만드려는 어떤 시도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실제로 저 역시 왜 신경정보 전달에 시냅스와 신경전달물질의 존재가 필요한지에 대해 궁금했었는데 거기에 대한 아주 좋은 설명을 찾은 것 같습니다. 만약 신경세포들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전기적으로만 신호가 전달되면 더 단순한 구조로 효율적이고 빠르게 신호를 전달했을지도 모르지만, 뇌는 이런 단순함과 효율을 추구하기 보다는 각 단계마다 서로 다른 조합의 신경전달물질을 사용함으로써 다양성과 융통성을 선택한 것입니다. 실제 우리 인간의 진화 역시 특정 환경에 대한 최적화 보다는 다양성과 융통성을 갖는 쪽으로 진화했기에 환경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 될 수 있었고 현재 먹이사슬의 정점에 설 수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 선택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회로도와 정해진 알고리즘에 근거하는 현대 컴퓨터 기술이 이런 다양성과 융통성, 그리고 이로 인해 생겨나는 창발성을 갖추기는 어렵기에 저자의 이런 주장에 저도 동감하게 됩니다. 아무도 계산 빠르게 하는 컴퓨터는 상상해도 시를 짓는 컴퓨터는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죠.
뇌의 발달과 기능 구성에 있어서 흥미로웠던 것은 출생 전 급격하게 증가한 뇌 세포들이 출생 이후 연결을 시작하면서 사용하지 않으면 (기능이) 퇴화하는 결정적인 시기를 거친다는 것입니다.
갓 태어난 오리가 처음 움직이는 물체를 어미로 인식하는 각인처럼 대부부의 동물은 학습에 결정적인 시기가 있으며 아예 유전적으로 프로그램밍 된 행동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탁월한 융통성으로 인해 학습에 있어서 민감한 시기가 있긴 해도 그런 결정적인 시기를 갖지는 않는 편입니다. 그러나 신체 기능에 있어서는 이런 결정적인 시기가 여전히 유효한듯 합니다.
아기 때 사소한 감염을 치료하기 위해 2주간 한쪽 눈에 반창고를 붙인 소년이 그 눈을 실명한 사례가 그것인데, 어른의 경우라면 이미 신경의 연결이 확립되어 그런 처치가 문제가 없었겠지만 출생 직후의 아기는 아직 눈과 뇌 사이의 신경 연결 형성이 수립되지 않았고 바로 그 때가 신경 연결 형성에 결정적인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기본 능력에서부터 고차원적인 기억에 이르기까지 신경망의 연결이 대단히 중요한 역활을 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보다 낮은 차원의 기본적인 능력일 수록 되돌리기 어려운 불가역적이고 결정적인 시기가 있는 듯 합니다. 그리고 이는 발달 초기 자녀에 대한 양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해주는 근거가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현대의 뇌 연구는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에 의해 상향식 연구와 하향식 연구가 이루어 지고 있으나 아직 두 연구결과가 서로 만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뇌에 대한 연구를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독일 서쪽에서 진공하는 연합군과 동쪽에서 진공하고 있는 소련군처럼 언젠가는 엘바강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그 엘바강이 어떤 모양일지 궁금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라는 게슈탈트 원리가 살아 숨쉬는 뇌가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유혹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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