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문명은 많은 직업을 낳았으며 그 중 일부는 변화되고 존속되었으며 그 중 일부는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그런 직업이 있었나 싶은 직업 중 하나로 활자를 뽑아 배열하는 식자공을 꼽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책을 인쇄하기 위해 반드시 활자를 선별해 조판하는 식자공이 필요했지만 컴퓨터의 발달과 함께 그 일은 편집 디자이너와 컴퓨터의 몫이 되었습니다.
컴퓨터와 탁상 출판 시스템이 생겨나지 않았다면 여전히 식자공은 긴요한 직업으로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단지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의 외국어 교육은 앞으로 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접근으로써의 언어 공부는 계속되겠지만 말입니다.
한국인은 영어에 목숨을 건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영어 교육열이 대단히 강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너무 많은 사회적 비용을 지출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아이의 혀에 메스를 댄 다는 해외 토픽감 기사나 토플 같은 영어 시험의 성적 향상을 위해 인격적인 모욕과 스트레스 마저 당연하게 여기는 학원 시스템과 여기에 몰리는 수강생들에 관한 기사를 보고는 도를 지나친 광기마저 엿보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영어 교육은 이젠 거기에 밥숟가락 걸친 사람이 너무 많아 파국을 보기 전까지는 계속 덩치를 불리며 비탈길을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보입니다. 영어가 경쟁력이라고 외치는 사람을 면면을 살펴 보면 거의 대부분이 영어 교육 산업 종사자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영어를 배운 사람들 상당수가 다시 영어 교육 산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젠 그 덩치에 압도되어 모두 거기에 휩쓸려 더 큰 눈덩이를 만들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가까운 미래에 그 파국이 보일 듯 합니다.
다음은 얼마 전 한 인터넷 신문에 실린 기사의 일부입니다.
2005년 10월 27일 피츠버그시 카네기멜론 대학(CMU). 이 대학 연구진을 포함한 미국의 여러 학자들과 독일 칼스루허 대학 관계자들이 영상 회의를 열었다. 이날 회의는 CMU 알렉스 웨이벨 교수팀의 통역기 연구가 최초로 공개되는 자리.
대만 유학생 스탠 조우씨가 입 주위와 목에 11개의 전극을 붙이고 등장했다. 조우씨는 모국어인 만다린어로 중국어를 모르는 회의 참석자들에게 말했다. 조우씨의 몸에 붙은 전극들은 입 동작을 파악해 조우씨의 중국어 정보를 컴퓨터로 보냈다. 1~2초 뒤에 조우씨의 말은 영어로 바뀐 채 스피커를 통해 회의 참석자들에게 들렸다.
"Let me introduce our new prototype. You can speak in Mandarine and it translates into English or Spanish."(제가 우리의 새 통역기 모델을 소개해 볼게요. 여러분들은 만다린어를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영어와 스페인어로도 통역될 수 있고요).
이 기사에 따르면 관련 전문가들은 앞으로 10년 이내에 전문 통역기가 나올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특정 영역-여행이나 의학, 엔지니어링 등-만의 전문 통역이 아니라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통역기가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 가까이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기는 합니다. 비록 문자 수준의 해석이기는 하나, 일본은 진작에 한국과 중국어 번역기 개발에 열중해왔고 현재 한국어 사이트와 일본어 사이트 간에는 실시간 번역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이트에서는 한국 네티즌과 일본 네티즌 간에 한일 감정을 앞세운 치졸한 말싸움을 각자의 언어로 주고 받을 만큼 문자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영어의 경우에도-일본어 번역 보다는 좀 더 실망스럽긴 하지만, 구글에서 영어 사이트의 실시간 번역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말 10년 내에 이것이 가능해지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자, 이제 외국어 공부는 모두 때려 치우자! ' 이 딴 주장이나 하려고 장황하게 말을 꺼낸 것은 아닙니다. 컴퓨터에서 자연어 명령어 처리기를 개발해서 음성 명령을 인식하게 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 제가 아는 한도에서만 해도 IBM의 OS2 시절부터이니 십수년이 더 되었습니다만 아직도 제 컴퓨터는 제 말을 못알아듣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통역기의 등장과 그 영향력의 파급은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지리라 보아집니다. 실시간 통역기는 다시 바벨탑을 쌓아올리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제껏 인류가 접하지 못했던 솔루션으로 그 상업적 가치는 대단히 크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이 기존의 단방향 커뮤니케이션을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으로, 이동전화가 위치에 제약받지 않고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몰고온 경제적 가치는 이미 충분히 경험해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인터넷과 이동통신이 결합하는 새로운 컨버젼스 기기-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다시 우리 목전에서 해일처럼 밀려오고 있습니다. 아마 이 물결이 우리를 휩쓸고 난 그 다음 물결은 바로 언어 장벽이 해소를 통한 전지구적 정보 소통-커뮤니케이션이 되리라 믿습니다. 기존의 인터넷, 이동통신이 정치, 사회, 문화, 경제에 끼친 파급효과를 생각한다면 이 거대하고 매력적인 전인미답의 신대륙을 코 앞에 두고 가만히 앉아 손가락만 빨고 있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미덕이 아니겠죠.
정작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아이들이 주역이 될 근 미래가 우리 아이들에게 요구할 핵심 역량은 무엇일까 하는 문제 제기 입니다. 만약 학자들의 예언대로 10년 후 외국어를 실시간으로 통역하는 통역기가 나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고 또 어떤 능력이 더 핵심적인 능력으로 평가 받을까요?
예를 들어 한국인과 미국인 그리고 중국인이 각자의 나라에서 이번 수출 물량의 가격 조건을 휴대전화로 통화하고 있습니다. 실시간 통역기가 장착된 이 휴대전화는 각자가 자신의 모국어로 하는 말을 동시에 상대방 언어로 해석해서 상대방에게 들려줍니다. 현재의 휴대전화의 컨버젼스를 살펴보면 이 정도 상황 설정은 충분히 가능할 것 같군요. 자, 그러면 이 상황에서 요구되는 능력은 무엇일까요? 외국어 구사 능력일까요? 자신의 생각을 설득시키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일까요? 적어도 지금까지는 다국적 커뮤니케이션 상황에서 '외국어 구사 능력'의 비중이 컸지만 앞으로는 좀 더 무형적인 '설득력'이 더 중요한 역량이 되지 않을까요?
10년이라면 지금 어린이라고 불리는 연령대 아이들이 청년이 될 무렵입니다. 과연 그 때에도 지금처럼 영어교육 시장이 위세를 부릴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 보다는 해당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고 문화적 다원주의 입장에서 그 문화를 존중하고 수용할 수 있는 학습의 기회가 커져 나가기를 개인적으로 기대합니다만 그건 논외로 하고.
여튼 중요한 건 우리 아이들인데 기껏 청춘을 식자공 기술 익히는데 바쳤는데 좀 인정받고 먹고 살만하니 컴퓨터가 나와서 회사에서 나가라고 하더라... 뭐 이런 일이 우리 아이들에게 일어나지 않으란 법은 있을까요?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우리 아이들이 사회활동을 시작할 근 미래에도 그렇겠지만 진정한 핵심역량은 영어가 아닙니다. 그런데 근미래에는 그렇다고 쳐도 지금도 핵심 역량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소린가 하는 의문을 품을지도 모르겠군요.
조기 유학을 통해 딴 건 몰라도 영어 능력은 갖추었다고 믿어지는 아이들이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조기 유학생이 기업에서 환영받고 있느냐? 결론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리고 아직도 일부에서는 그 희소성 때문에 찾는 경우가 없지는 않으나 대기업의 경우에는 써 보니 아니더라는 판단이 인사 담당자들의 입에서 슬슬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공부한 사람 중에서도 필요한 만큼의 외국어 구사 능력을 갖춘 후보자들은 널리고 널렸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이고, 조기유학으로 영어는 잘 할지 모르나 한국 문화에 문외한이 되어 한국의 조직 사회에 잘 적응을 못한다는 것이 두번째 이유 입니다. 천재도 사회성이 떨어지면 자폐로 오진되는 세상인데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그걸 적절하게 펼쳐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실상 대부분의 경우에는 업무 수행 능력이 특출나게 더 좋은 것도 아닙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의 미래를 책임질 핵심 인재를 유학파에서 찾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유학파가 모두 삼성의 핵심 인재인 것은 아니듯이 말입니다.
하버드니 스탠포드니 하는 명문 대학을 나왔다고 해도 조직 문화에 적응 못하면 튕겨나가는 마당인데,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미국의 지방 사립대학 졸업생을 선뜻 한국대학 졸업생 대신 선택하는 위험을 선택할까요?
조기 유학은 아예 한국을 돌아오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선택할 수 있는 교육 전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 나라에서 그 나라 사람으로 정착하고 산다면 모를까 한국을 돌아올 것을 전제로 한다면 투입 대비 효과가 비효율적인 교육 전략이라는 말이죠
물론 한국에서 학부를 보내고 다시 외국으로 나가서 전문 학위를 받아오는 네오엘리트 코스가 요즘 각광을 받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 코스도 일단은 한국의 명문 대학 학부를 졸업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곤란합니다. 그런데 한국 명문 대학 입학은 해외에서 성장한 아이들에게 특례가 아니라면 사실 상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해외에서 자녀를 키우시는 학부모님들이라면 다들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당장 해외에서 자녀를 키우는 한인 가정 중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전제로 하는 경우에는 외국 학교 공부와는 별개로 한국 수능 과목 공부를 별도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러니하죠. 한국의 교육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면서 자녀를 조기 유학 보내고서는 정작 외국에서 다시 한국 방식으로 한국 공부를 시키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조기유학으로 샜군요. 조기 유학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이야기 하기로 하고 다시 주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어쨌던 외국어 구사 능력 자체는 지금까지는 어땠는지 몰라도 앞으로는 점점 더 중요한 핵심역량에서 주변부 역량으로 옮겨질 것 입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만큼 정확하게 인식하고 적절하게 판단하여 올바르게 표현하는 '설득력'의 중요성은 더욱 더 강해질 것입니다. 무엇으로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더욱 더 중요한 핵심적인 역량으로써 우리 아이들에게 요구될 것입니다.
P.S 말이 길어지고 산만해졌습니다만 이 글의 주제는 자녀에게 키워줘야 할 핵심역량은 따로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지, 영어나 조기 유학 자체가 필요없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타문화 이해와 함께 외국어의 사용 능력은 통역기가 이동전화처럼 쓰인다고 하더라도 보조적인 능력으로써 여전히 대단히 중요하고 유용한 지식 형성의 기초가 될 수 있으며 조기 유학 역시 자녀의 미래 계획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대단히 좋은 자녀 교육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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